1.1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미래
흔히 ‘IT’information technology라는 말로 불리는 정보기술의 출현 이후 세계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초기만 해도 단순한 계산기에 불과했던 컴퓨터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인간 삶 자체가 지금까지 실존을 이어가던 공간으로부터 이탈하여 디지털 공간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우선 우리 삶의 심층에서 보면, 근대 과학에 입각해 단일한 세계상을 구축하려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시도를 완성하는 동시에 붕괴시키는 아이러니를 촉발했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 아이러니는 우리 삶의 표층에서는 인간 실존의 가장 구체적인 활동 영역인 경제를 디지털 공간으로 옮김으로써 삶의 실질적 아이러니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IT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일상적 경제생활이 디지털 공간으로 대거 옮겨가면서 급기야 2008년 세계 금융위기라는 경제 붕괴상황을 초래한 것이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내 논문 「세계화의 위기와 건축의 미래」, 『건축』 56호, 2012. 1. 대한건축학회, 49-56쪽 참조.
그러나 경제위기 이후 IT 기술은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열어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금융위기 발생 1년 후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협력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ption이다. 협력적 소비는 개인의 과시적 소유를 조장함으로써 소비자를 부채의 늪으로 내몰고 있는 기존의 소비경제와 달리 ‘공유’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금융위기를 통해 엄습한 기존 경제의 절망 속에서 공유경제라는 희망의 빛이 소셜미디어로 재구축된 디지털 공간에 새어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 디지털 문명의 한가운데서 이제 인간은 전혀 상반된 갈림길을 앞에 두고 미래의 희망을 가늠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IT는 어떤 성격의 기술이기에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는가? 과거에도 정보를 전달, 유통하는 기술은 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IT는 편지나 책으로 정보를 전달하던 과거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IT에서 모든 존재 사태는 0과 1의 2진수와 그에 상응하는 on/off 전기신호의 상호 변환에 기초한 디지털화 과정 속에서 처리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제어하는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IT가 혁신적인 이유는 이렇게 2진수의 상태와 전자 상태를 상호 변환시키는 단순한 원리 하나만으로 고도의 기술적 과정들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IT의 출현은 20세기 이후에 본격화되었지만 그 역사는 적어도 시공간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화했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공간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는 근대 과학에서 시작되었다. IT의 발전 역사를 심층적으로 추적해보면, 이 기술은 ① 세계를 0과 1의 2진수 논리로 계산하려는 철학적 이념, ② 그것을 전류의 변환을 통해 제어하는 기술의 발전, ③ 이 기술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물질실리콘의 발견 등이 상당 기간을 거쳐 하나로 합류하면서 실현된 성과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철학자들이 보편기호학universal charakteristika이나 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을 구상하면서 기대했듯이, 모든 존재하는 사태가 하나의 수학적 원리로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 사태가 디지털이라는 2진 원리로 처리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것을 가능케 한 IT를 그저 현대에 출현한 여러 기술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IT는 단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현대의 여러 기술을 담아내는 ‘플랫폼’ 기술인 것이다. 그리고 IT가 수행하는 플랫폼 기능은 동일한 틀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수렴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선언하듯 IT의 선구자 네그로폰테는 1995년 존재가 곧 디지털임을 선언하는 『Being Digital』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선언은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수렴되고 있다”Everything is converging on digital는 언명으로 더 구체화되었다. 디지털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론적 트렌드가 되어 역사의 단계를 디지털 컨버전스의 과정으로 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0과 1을 포함한 모든 수는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고 연속적인 존재방식을 갖는 자연적 존재자들과는 다르다. 수는 어떤 장소에도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자이다. 또 자연적 존재자는 임의로 분할되지 않는 연속적continuous 특성을 갖지만, 수는 얼마든지 나누고 분리할 수 있는 단속적discrete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수의 존재론적 특성은 무한한 방식의 배열을 가능하게 한다. 이 때문에 2진수로 환원되는 존재자들 역시 자연적 본성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수적 변양이 가능한 가변적 존재자로 나타난다. 디지털화된 존재자는 그 존재를 결정했던 배열의 변양을 통해 다른 존재 양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자체 안에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존재자의 경계가 자유자재로 해체되면서 결합, 혼종, 대립, 혹은 새로운 것으로 창발하는 현상을 일으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컨버전스수렴가 오히려 다양성발산을 생산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의 통일적 세계상을 꿈꾸었던 기존 형이상학이 디지털 원리를 근간으로 한 IT의 발전으로 인해 완성과 동시에 붕괴라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IT의 디지털 환원은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배열이 자유로운 수적 존재로 동질화시킴으로써 오히려 배열의 무한한 변양 과정을 통해 하이브리드적 결합으로 이끈다. 물론 이 모든 수렴과 변양의 과정은 프로그램에 의해 제어된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불확실성, 부정확성이 제거된 정확한 알고리즘과 빠른 처리속도를 본질로 하는 고효율의 논리적 처리 양상을 구현한다. 따라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IT는 엄청나게 다양한 변양의 가능성을 갖지만 이 과정이 정확하고 빠르게 제어된다.
한편, 모든 것을 디지털로 환원하는 IT는 단순히 우리가 사는 공간 속에 정해진 위치를 부여받고 거기서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공간을 출현시킨다. IT는 존재하는 사태를 디지털 상태로 변환하고 또 디지털 상태를 물리적 상태로 재현하는 전자적 매체들 즉 디지털 미디어들로 구성된다. 이 기기들이 디지털화된 데이터를 전하 값으로 변환하면, 그 데이터들은 전류나 전파 상태로 송수신될 수 있고, 이 전류나 전파 상태는 그 특성상 송수신 속도가 광속에 근접한다. 이렇게 디지털 기기들이 데이터를 광속으로 서로 송수신할 수 있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공간이 출현하였는데, ‘디지털스페이스’가 바로 그것이다.
디지털스페이스는 모든 존재자들의 디지털화와 광속에 가까운 연결로 인해 거리와 시간이 증발해버린 공간이다. 이 공간은 연장extension이 부재하는 곳이다. 여기서 디지털스페이스는 모순율을 위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모순율’이란 한 대상이 점유하고 있는 하나의 지점이 동시에 다른 것에 의해 점유될 수 없다는 연장 공간의 배제성에서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스페이스는 연장 공간의 논리 법칙인 모순율이 지배력을 상실한 공간이다. 따라서 IT 기기들이 서로 유무선으로 연결되어 디지털 공간을 만들어낼 때, IT 기기들이 개별 단위로 갖고 있던 특징들 곧 정확히 제어되는 고효율의 논리적 처리 양상은 더 이상 디지털 공간에서 관철되지 않는다. 오히려 디지털스페이스는 논리법칙을 위반하며 모순이 끊임없이 혼재하는 부조리한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스페이스가 이처럼 모순이 혼재된 공간이라면,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 역시 끊임없는 변화하는 불안정한 역동성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디지털스페이스는 이러한 변화의 역동성 속에서 항상 무엇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벤트 공간인 것이다.
이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는 이런 공간적 특성을 갖는 디지털 스페이스에 언제 어디서나 접속하여 그곳에서 존재를 실현하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다. 즉 IT의 발전 양상은 IT를 통한 디지털화 과정이 모든 존재하는 것에 스며들어 편재하는 유비쿼티ubiquity의 실현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디지털스페이스에 접속하여 존재를 현실화하는 모빌리티mobility의 과정에 들어간다. 이렇게 모빌리티와 유비쿼티라는 두 과정으로 진행되는 IT의 발전은 결국 유비쿼터스 모바일ubiquitous mobile 컴퓨팅 시대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과정은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이 아니며, 자연적 존재자를 디지털화하는 각종 모바일 유비쿼터스 디바이스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간 이 디지털디바이스는 우선적으로 디지털화를 허용하는 존재자에서부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디지털화가 가능한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방식에 따라 용이하게 개발될 수 있는 것과 상당한 시간과 기술적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개발될 수 있는 것 등으로 편차가 심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이 완성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디바이스들의 편차는 좁혀지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수렴되는 과정에 들어서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IT의 발전을 디지털화라는 기저의 원리에서부터 추적해본 결과, IT에 의한 디지털화는 수렴과 발산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며, 이로부터 출현하는 디지털스페이스는 모순이 지양되지 않는 잡종 변이의 급변 공간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디지털스페이스의 이런 특성이 우리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이미 보고 있듯이 인간의 실존이 모순이 혼재하는 디지털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접속을 유지함으로써 영위되는 것이라면, 이런 인간의 존재 방식은 현실을 혼합현실로 겪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혼합현실에서의 실존 방식이란 자아의 정체성은 물론 타자와의 소통관계나 그로 인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까지 유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들은 인간의 미래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화상을 그리도록 한다. 첨단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 위에서 기술에 의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 곧 트랜스휴먼Transhuman 내지 포스트휴먼Posthuman을 실현하려는 테크노퓨처리즘Technofuturism이 그것이다.
‘테크노퓨처리즘’은 문자 그대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첨단기술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여 그로부터 미래를 구축하려는 입장이다. 이러한 테크노퓨처리즘이 인간의 실존 방식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만들어진 미래 이념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실로 현재의 테크노퓨처리즘을 견인하는 철학적 바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테크노퓨처리즘의 가장 핵심적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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