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초등학교 내내 석천石川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 살았다. 물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은 확실히 많았다. 흔히 돌산이라고 부르던 산을 지나야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자주 돌산에 가서, 살살 긁어내면 부서져 내리던 돌가루를 곤충 채집 통에 담아 오곤 했다. 숨어 있던 여러 빛깔을 보는 것이 좋았다.
집은 산 밑에 있었다. 울타리가 낮아서 집 안에서는 집밖이 다 보였다. 마루에 앉으면 집 앞으로 몇 갈래의 길들이 보였지만, 또 다른 산속으로 사라지는 그런 길들이었다. 집 뒤는 나지막한 산이었다. 바람이 불면 산의 나무들이 짐승처럼 울어 댔다. 나무들의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두려움과 흥분이 함께 생겼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어느 날 대문 밖에 오동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한곳에 나란히 심은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울타리의 왼쪽 끝에 한 그루, 대문 앞쪽에 한 그루, 오른쪽 끝에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우리 삼 남매에게 각각의 나무를 정해 주며 잘 키워 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동나무들도 우리와 함께 자랄 것이라고 했다. 솔숲으로 난 길의 시작에 심어진 것이 왼쪽의 오동나무였다. 대문 앞에 심어진 가운데 나무는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있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살짝 비껴 심어, 대문을 가리지는 않았다. 오른쪽에 심어진 나무 옆은 길이 아니라 밭이었고 밭 너머 산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 말대로 세 그루의 오동나무는 잘 자랐다. 우리 삼남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랐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대로 자기 나무에 물도 주고 서로의 나무에 가서 키도 재 보고 어쩌다 떨어진 커다란 잎사귀로 얼굴을 가리고 마당에서 맴을 돌기도 했다. 어둑어둑해진 마루에 앉아 있으면 오동나무 잎사귀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동나무 잎사귀들이 길과 하늘을 가리기도 했고 어둠과 분간되지 않던 잎사귀 사이로 술에 취한 아버지가 손에 과일 봉지를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는 늘 찬바람이 묻어 있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가 정해 준 내 나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잊어버렸다. 아마 중학교 1학년 겨울, 느닷없이 석천을 떠나면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잊었다고 다짐했고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보니 진짜 잊어버렸다. 서울로 오던 그날 석천에서 조암의 터미널로 가는 버스 안에서 친했던 같은 반 아이를 만났다. 그 애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터미널에 붙어 있던 중국집에서 엄마와 짜장면을 먹고 그길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탔다. 집의 뒷산에 올라가 보던 저녁 해도, 노을이 점점이 떨어지던 서해 염전도, 서해 바다도, 돌산도 다 두고 왔다. 마당의 오른쪽 화단에서 꽃보다 먼저 피고 꽃보다 나중에 지던 라일랑 향기도, 아버지도, 오빠도, 아버지가 듣던 「아리조나 카우보이」도,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 삼 남매를 위해 심어 주었던 오동나무도, 오동나무 안에서 풀려나오던 어둠도, 바람도 다 두고 왔다. 서울로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포로교환
서울로 올라와 처음 산 곳은 외삼촌 집이 있던 구로동이다. 엄마는 의지할 피붙이가 필요했다. 그때의 구로동은 완벽한 변두리였다. 114번 버스 종점 뒤에 서 있던 고층 아파트와 종점 앞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노점상들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극명한 대조 속에서 나는 현실에서 발을 떼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비겁한 방법을 택한 이후로 시를 쓰기 전까지 땅은 쳐다보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썩어 가는 사과 사진을 찍으며 혼자 신기해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돌아와 놀이터에서 한동안 하늘 사진만 찍었으며, 콘서트와 연극을 보러 다녔다.
관객이 나 혼자인 연극도 있었다. 홍대 산울림 소극장에서 하던 「포로교환」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나 말고 객석에 앉아 있던 다른 한 명은 연출가였다. 남자 배우 둘만 나오는 연극으로, 남한 군인과 북한 군인이 무대 가운데 있던 책상을 넘어가면 포로로 역할이 바뀌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철밥통 하나만 달랑 들고 책상을 넘어가면, 존재가, 이데올로기가 바뀐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두 배우는 공연이 끝난 뒤 내게 이름을 물어봤다. 얼마 후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더니 그때 배우 중 한 사람이 나를 알아봤다. 나는 물세례 대신 장미꽃을 받았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계속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이사를 다녔고, 그와 상관없이 땅에서 떠오른 내 발은 허공을 부유했고, 허공에서 발이 멈칫할 때마다 뜬금없이 「포로교환」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처음 나온 컵라면이 재수할 때쯤에는 여러 종류로 다양해졌고 나는 하루에 여러 종류의 컵라면을 바꿔 먹으며 신설동에 있는 입시 학원에 1년간 다녔다. 동대문과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곳 역시 변두리 정서로 가득 찬 곳이었다. 전통의 라사라 복장학원 건물과 새로 지어진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신설동 전화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건물들을 볼 때마다 뜬금없이 또 「포로교환」이 생각났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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