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는 누구인가
1장
사상의 뿌리
조부의 이름으로
1957년 6월,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이 연단에 섰던 제 조부 기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세계의 자유주의 국가와 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58년이 지나 이번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 일본국 총리로서 처음으로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5년 4월 29일, 상기된 표정의 아베가 미국 상•하원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등장했다. 1945년 8월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33명의 내각총리대신이 취임했지만 미국 상•하원 의원들을 한데 모아 놓고 합동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베가 처음이었다. 박수가 잦아들고 내빈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이 끝난 뒤 미일동맹을 '희망의 동맹'으로 만들자는 45분에 걸친 연설이 시작됐다. 아베의 인생에서 영광스런 순간으로 기억될 이 연설에서 그가 가장 먼저 호명한 인물은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였다.
한국에는 A급 전범 용의자라는 음험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기시는 어떤 인물일까. 기시는 1986년 11월 13일 야마구치山口県현 구마게熊毛郡군 다부세田布施町초에서 아버지 사토 슈스케佐藤秀助와 어머니 모요茂町의 3남 7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시의 아버지 슈스케는 원래 기시岸가에서 태어났지만 부인 모요茂世와 결혼해 지역의 명문 사족士族인 사토가에 데릴사위婿養子로 들어갔다.
슈스케와 모요 사이에서 태어난 '기시 3형제'는 메이지에서 쇼와昭和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일본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는 인물들로 성장했다. 기시의 형인 이치로市郎는 당시 일본의 수재만 들어갈 수 있었던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소위로 임관한 뒤 해군 내에서도 에이스들만 들어갔던 해군대학에 진학해 사실상 수석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군인다운 육체의 강인함은 타고나지 못했는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 요동반도 끝의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旅順의 요새 부사령관을 거쳐 1940년에 중장으로 퇴역했다. 그는 이후 『해군 50년사』 등을 집필하며 지내다가 동생 기시가 총리로 취임한 이듬해인 1958년에 숨졌다. 그리고 기시의 6살 아래 동생은 전후 일본의 최장수 총리이자 1972년 4월 오키나와沖繩 반환을 실현시킨 에이사쿠栄作(1901~1975)다. 기시가 '사토' 노부스케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된 것은 중학생 때 큰아버지인 기시 노부마사岸信政의 양자로 입적됐기 때문이다. 노부마사에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보내진 것인데, 기시는 이 소식을 처음 듣고 싫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기시의 고향인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은 메이지유신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지역이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메이지 지사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를 건설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1868년 도쿠가와徳川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다. 메이지 지사들의 스승은 아베가 여러 차례 존경하는 인물로 언급한 적이 있는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메이지 지사들은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의 근대화를 실현한 위대한 인물들이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앞장선 원흉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요시다의 제자로는 메이지유신 3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고종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일본 육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인 을미사변의 배후로 꼽히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Agreement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가쓰라, 조선의 초대 총독으로 무단통치를 실시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1852~1919) 등이 있다.
기시의 본가인 사토 가문과 요시다는 직접적인 인연으로 얽혀 있기도 하다. 기시의 딸이자 아베의 어머니인 요코(1928~ )가 쓴 회상록 『나의 아베 신타로』(1992)를 보면, 기시의 증조부가 되는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816~1900)는 "옛 하기萩 번사"로 사토 가문의 "'패밀리 프라이드'의 정점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인 동시에 "요시다에게 군학軍学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노부히로는 요시다의 제자들인 이토, 이노우에 등과도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시-사토 일가의 친척 가운데 또 다른 유명인사로는 외무상으로 국제연맹 탈퇴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 추축국 동맹 협상을 주도했던 마스오카 요스케松岡洋右(1880~1946)가 있다.
기시가 태어난 1896년은 격동의 시대였다. 기시의 출생 직전인 1894~1895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또한 기시가 소학교 저학년생이던 1904~1905년에는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격파했다. 아베는 "조부는 일청전쟁 직후의 시기인 메이지 29년(1896년)에 태어났다. 일본이 부국강병의 노선을 달리며 크게 비약하던 영광의 시대가 그의 청춘이었고, 그의 젊은 날 그 자체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시다는 제자들에게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정한론을 가르쳤으니, 기시 역시 이 같은 사상의 세례를 받으며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라 추정된다.
천황과 엘리트 관료들
기시는 지역의 수재들이 다니던 야마구치 중학을 졸업한 뒤, 제국대학 입학을 위한 예과 역할을 하던 도쿄의 1고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기시의 일생을 다룬 여러 전기들을 보면 당시 법학과 교수였던 우익 헌법학자 우에스가 신키치上杉慎吉(1878~1929)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우에스기는 천황은 곧 일본이므로 일본은 당연히 그의 뜻을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천황주권설'을 주장했다. 그런 우에스기와 대립한 이는 천황도 국가의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1873~1948)였다.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천황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를 놓고 진행된 이들 사이의 논쟁은 결국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는 1920~30년대 일본사회 분위기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우에스기의 제자들은 일곱 번 고쳐 죽어도 천황을 위해 살겠다는 의미의 '시치게이샤七生社'를 결성해 1932년 사회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혈맹단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미노베의 책 출판이 금지됐고, 1936년 2월 21일 미노베는 우익의 총격을 받고 큰 부상을 당했다. 미노베가 공격을 당한 지 5일이 지난 26일, '쇼와유신•존황토간'(쇼와유신을 단행하고, 황제를 떠받들며, 역적을 토벌하자)이라는 구호를 내건 청년 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진압됐지만 더 이상 누구도 군부와 우익의 폭주를 막을 수 없게 됐다. 그 결과는 처참한 전쟁과 패전이었다.
학창 시절 기시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 극우 사상가인 기타 잇키北一輝(1883~1937)가 있다. 기시는 "불꽃이 흩어지는 듯 번쩍한, 단 한 번뿐이었지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이 기타였다. 〔기타의 저서인〕 『일본개조법안』(『국가개조안원리대강』国家改造案原理大綱)은 기타의 국가사회주의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삼아 일대 혁신을 우리 국체와 연결한 것으로, 당시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무척 가까웠으며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실행방책을 담고 있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현 체제를 전복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뒤 강력한 천황의 통치를 바탕으로 국가가 직접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기타의 국가사회주의 사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엘리트 관료들이 국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해가야 한다는 기시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시에게 중요한 것은 '민의'가 아니라 천황의 뜻을 이어받은 엘리트 관료들의 '영도'導頜였다. '엘리트의 영도'는 이후 기시의 삶을 꿰뚫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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