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
제리 A. 코인
JERRY A. COYNE
지적 설계는 복음주의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다. 일반적인 기독교, 나아가 일반적인 신학적 사고도 아니다. …… 지적 설계는 새로운 과학 연구 프로그램이다. 설계 이론가들은 그 이론의 가치를 과학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 윌리엄 A. 뎀스키. 《설계 혁명》2004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과학이론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봐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놓고는 과학이론의 개념적 탄탄함을 유지할 수 없다.
─ 윌리엄 A. 뎀스키. 《지적 설계: 과학과 신학의 다리》1999에서
어느 쪽일까? 지적 설계는 대다수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성서에 쓰인 창조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은 형태일 뿐인가, 아니면 과학 ─ 과학 수업에서 토론할 가치가 있는 다윈주의의 대안 ─ 인가? 위에 소개한 두 개의 인용이 암시하듯이 여러분은 지적 설계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글에서는 그 대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애매모호함은 의도된 것이다. 지적 설계는 별개의 두 대상에게 호소해야 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지적 설계 주창자들은 일반대중에게는 자신들의 이론을 순수과학인 것처럼 제시한다. 이것은 공립학교에서 지적 설계를 가르치도록 권장하는 그들의 교묘한 선전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시애틀의 우익 두뇌집단이자 지적 설계 선전본부인 디스커버리 연구소Discovery Institute에서 만든 악명 높은 《쐐기 문서》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지적 설계는 사회와 과학에서 유물론을 몰아내고 그것을 신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교활한 시도의 일환이다. 지적 설계는 헌법수정조항 제1조를 피해 복음주의 기독교를 잠입시켜 예수에게로 교실 문을 열기 위해 개정되고 위장된 창조론이다.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물론, 두 번째 대상 즉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집단인 복음주의 기독교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청중에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설계 운동을 믿어보자. 지적 설계가 ─ 자연세계를 다윈주의 진화론보다 더 잘 설명하는 ─ 더 뛰어난 대안적인 과학이론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논증은 검증을 통과할 수 있을까/ 다윈주의 이론은 한 시절을 풍미한 훌륭한 이론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어야 할 이론으로서 뉴턴 역학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적 설계는 자연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다윈주의보다 훨씬 못할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과학이론의 요건들조차 채우지 못한다.
그 요건들은 무엇인가? 과학이론은 추측이나 추론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 대한 증거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틀이다. 훌륭한 과학이론은 예전에 설명되지 않았던 광범위한 자료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이론은 검증 가능한 예측을 해야 하며, 반증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태양의 중력에 의해 별빛이 휘는 것을 측정함으로써 확실한 검증과 확증을 받았다. 만일 한 이론이 검증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이 빅뱅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과학이론이 아닌데, (그것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반증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 이론이 수많은 검증을 견뎌내고 수많은 옳은 예측을 했을 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곧 어떤 이론이 대단히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예컨대, 원자와 화학결합에 대한 이론들은 이론에서 사실로 변해 갔다. 둘 다 반증의 여지는 있지만(원자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모든 자료가 허위였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면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할 때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는 어떻게 비교될까? 다윈주의부터 살펴보자. 다윈 이후 150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신다윈주의라 불리는 현대 진화론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화는 일어난다. 즉 현생 종은 과거에 살았던 다른 종의 후손이다.
둘째, 진화적 변화는 수천 년 혹은 수백만 년에 걸친 개체군의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셋째, 생명의 새로운 형태는 하나의 계통이 두 개로 갈라짐으로써 생긴다. 이 과정을 종 분화라고 한다. 이런 분기가 계속되면서 종의 계보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생명의 나무’로서, 뿌리는 최초로 생긴 종이고 그 잔가지들은 수백만의 현생 종들이다. 현생 종의 어느 잔가지 한 쌍을 선택해 가지들을 거슬러 올라가도 가지들이 만나는 마디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마디는 공통조상을 나타낸다.
넷째, 진화는 대부분 자연선택을 통해 일어난다. 현재의 환경에 더 잘 맞는 유전자들을 지닌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개체군에 유전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는 그 생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도’를 향상시킨다. 생물들에게 생활방식에 잘 맞게 설계된 모습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개선되는 적응도다.
이러한 주장들이 전부 다 유효한 것은 아니며, 전부 다 유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넷 모두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한 때부터 계속해서 쌓였고, 지금도 계속해서 쇄도하고 있다. 우리가 모은 자연에 대한 모든 정보 조각이 진화론과 일치하고, 그것과 모순되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신다윈주의는 화학결합 이론처럼 이론의 단계에서 사실로 굳어져있다.
무엇이 그 증거인가? 증거는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나는 다윈이 직접 제시한 것만을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다윈이 갖고 있었던 증거는 오늘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증거에 비하면 눈곱 만큼에 불과한 것이다. 증거는 화석기록, 현생 종의 해부구조와 성장과정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신기한 잔재들 그리고 생물지리학 ─ 지구 동식물상의 지리적 분포 ─ 에서 나온다.
가장 확실한 화석기록부터 살펴보자. 심지어 다윈의 시대에도 화석기록에는 진화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있었다. 그것은 지층에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생물 화석들이다. 맨 밑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해양 무척추동물의 화석이 나온다. 물고기는 훨씬 나중에 나오고,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는 더 나중에 나타난다. 신이 생물들을 창조했다면 왜 하필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가는 길을 따르겠는가? 그것은 진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다윈은 또한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 종 ─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대류 ─ 이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는 화석과 매우 닮아 있는 것을 관찰했다. 이것은 전자가 후자로부터 유래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화석기록을 통해 한 계통의 진화적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규조류는 더 커지고, 조가비는 골이 더 많아지고, 말은 몸집이 더 커지고, 이빨이 더 많이 드러나며, 인류 계통은 더 큰 뇌, 더 작은 이, 더 능숙한 두발보행을 진화시킨다. 중간단계 화석들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얘기하겠다.
죽은 종들 외에 현생 종들에게서도 진화의 풍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역사의 무의식적 흔적들”이라고 부른 잔재들이 그것이다. 이 잔재들은 많다. 새나 개미핥기의 배아 단계에서 발달하는 치아조직 ─ 이 치아조직은 이후 발육이 멈추어 돋아나지 않는다 ─ 은 이빨이 있던 조상들의 잔재다. 날지 못하는 키위의 깃털 아래 감추어진 작은 흔적 날개들은 그 조상들이 날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동굴에서 생활화는 몇몇 동물들은 시각이 없는 흔적 눈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시력이 있는 눈의 잔재다. 어떤 창조자, 어떤 인도하는 지능이 동물들에게 그러한 쓸모없는 치아조직, 날개, 눈을 줄 것인가?
우리 몸도 우리의 유래를 담고 있는 일종의 팰림세스트Palimpsest(쓰인 양피지 위에 덧쓰인 텍스트 ─ 옮긴이)다. 친숙한 예가 맹장이다. 이보다 덜 알려진 예로 되돌이후두신경의 나쁜 설계가 있다. 이 신경은 뇌에서 후두까지 이어져 있는 신경으로, 우리가 말하고 삼키는 것을 돕는다. 포유류의 경우 이 신경이 직선 길을 취하지 않고 흉곽까지 내려가서 심장 근처의 대동맥을 빙 둘러 후두로 다시 올라간다. 이것은 필요한 것보다 몇 배나 길다. 기린의 경우는 이 신경이 목을 두 번 횡단해야 하니 길이가 4.5미터나 된다. 필요한 것보다 4.2미터나 길다. 이렇게 추가된 길이 때문에 이 신경은 다치기 쉬운데, 그 구불구불한 길은 진화에 비추어보아야만 납득이 간다. 이러한 발생 경로는 물고기 조상의 발생 경로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고기의 발생 경로에서 되돌이후두신경의 전구체는 여섯 번째 아가미활에 붙어 있었다(아가미활은 배 발생 과정에서 형성되는 근육, 신경, 혈관으로 이루어진 구조로서 아가미로 발달한다). 육상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조상 혈관들의 일부가 사라지고 다른 혈관들이 재배열되어 새로운 순환계가 되었다. 여섯 번째 아가미활의 혈관은 뒤쪽의 흉곽으로 물러나 대동맥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것을 둥글게 둘러싸는 신경도 똑같이 뒤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선택은 가장 효율적인 배치를 만들어낼 수 없었는데, 그렇게 하면 신경을 끊어야 해서 후두에 신경 흥분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의 DNA에 파묻혀 있는 진화의 증거를 더 찾아보자. 우리의 유전체에는 기능을 하지 않는 DNA들이 뒤섞여 있다. 이 가운데는 조상들의 몸에서는 기능을 했던 수많은 불활성의 ‘가짜 유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왜 대다수 포유류들과 달리 인간은 식사할 때 비타민 C를 섭취해야 할까? 영장류는 이 필수 영양소를 더 간단한 화학물질로부터 합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타민 C를 합성하는 모든 유전자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이 경로의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된 유전자는 4000만 년 전에 돌연변이에 의해 불활성화되었다. 아마 과일을 먹는 영장류에게 그것이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정말 ‘지적’ 설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지적 설계론자들은 비효율성 혹은 흔적 구조에 기반한 진화 논증들이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지적 설계자라면 그러한 구조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정당하지 않은 신학적 가정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지적 설계론자들은 논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 진화 논증의 요지는 이러한 불완전성과 비효율성은 오직 진화가 일어났다고 가정해야만 말이 된다는 것이다. 생물이 진화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속이기 위해 창조주가 모든 생물들을 기만적으로 설계했다고 믿어야만 창조론에 안주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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