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민주주의라는 ‘시민의 집’
집으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집’이다. 통치의 특권을 독점한 군왕이나 소수 귀족이 지배하는 체제를 시민의 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치체제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가진 자유 시민이 없다면, 그들이 가꿔 갈 민주주의의 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사회든 시민은 다양한 이해와 열정을 가진 계층과 집단들로 나뉘어 있다. 공익이라고 불리는, 최선의 사회 이익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피할 수 없는 이견과 갈등도 있다. 이런 다양한 생각과 이익, 열정을 조직하려는 다양한 결사체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이다. 그런 결사체들로 차고 넘쳐흐르는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자유로우면서도 통합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어떤 내용의 공익이 ‘현실적으로 최선’인가를 두고 경합하는 정당정치가 좋아야 한다. 수많은 결사체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갈등을 몇 가지 공적 대안으로 통합해 경쟁하는 좋은 정당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런 정당들이 민주주의라는 시민의 집을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현실을 좋아지기 어렵다.
자율적 결사체라는 ‘집의 기반’과 정당정치라는 ‘집의 기둥’이 튼튼해야 그 집에 기거하는 시민들의 공동체가 안정될 수 있고, 그 위에서 민주적 덕성과 시민 문화가 성장할 수 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시민의 집을 만들 수 있어야 민주주의는 그 가치나 이상에 가깝게 실천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부로서의 민주주의
그리스어로 일반 시민을 뜻하는 demos와 통치 내지 권력을 뜻하는 krat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정치체제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 주의나 이념이기보다 정부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주의liberalism나 사회주의socialism처럼 ‘ism’을 붙여 democratism이나 democraticism과 같이 쓰지 않는다. 따라서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이라고 하듯이 민주정이라고 표현해야 더 좋을 때가 많다(이하에서는 기존의 용례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주로 쓰겠지만, 정부 혹은 정치체제의 유형을 가리키는 맥락에서는 민주정이라는 용어를 병기하겠다).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현대 민주주의의 긴 여정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열망을 ‘민중 정부’popular government라는 용어에 담아 표현했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 내용 가운데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잘 알려진 구절 역시 정부 또는 통치를 뜻하는 ‘government’를 규정하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좋은 정부를 통해 사회를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로우며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들자는 의미라 하겠다. 어떻게 해야 정부를 잘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제·사회·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민의 집을 가꿀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문제였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있어서 지식인이나 철학자들의 역할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체제 내지 정부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더 본질적인 측면이라면, 이들보다는 정치체제와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시민, 그리고 그런 시민의 대표인 정치가들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평등한 시민과 정치가가 함께 가꿔 가는 공동체적 전망, 그것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매력을 부각해 보고 싶은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처음에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학 입문서 혹은 개론서를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 순수 이론의 문제로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재미도 없고 긴장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따라서 이론적인 주제로서 민주주의를 말하되, 그것을 지금 우리의 현실 혹은 ‘실제로 작동하는 오늘의 민주주의’ 속으로 가져오려 했다.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을 한국적 현실과 지난 경험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적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 우리가 살 민주주의라는 시민의 집을 지어 볼 열정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보통의 집을 쌓아 올리듯이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 제도와 작동 방식을 하나씩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분명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인간의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만큼 편견과 오해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기에, 그런 오해나 편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나쁜 설계의 사례도 살펴봐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사례를 소재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생각과 그렇지 않은 생각’을 구분해 보고자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하나의 짝으로 다룬 민주주의 설명서라고 할 수 있겠다.
중단 없이 노력하는 민주주의자
민주주의에 대한 대표적 ‘비판자’인 플라톤Platon의 『국가』Politeia를 읽으면서 ‘정치철학을 참으로 재미있는 드라마로 만들었구나.’ 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정치철학을 이렇게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려 낼 수도 있는데, 민주주의를 흥미롭게 설명하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울까?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 실천하기도 어렵고 잘 설명하기도 어려운 공동체적 과제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여러 이론을 참조하고 지난 경험으로부터 지혜를 얻으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길밖에는 없지 않을까? 시시포스Sisyphus의 노력을 헛된 수고 혹은 불임의 시도라고 냉소하고 돌아서기보다는, 모두가 달려들어 그의 엉덩이를 받치고 밀어올리는 것이 주어진 운명과 싸우는 가장 인간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일 것이다. 민주주의자라면 그래야 한다고 본다.
책의 내용과 구성
책의 전체적인 주제 구성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장에서는 ‘민주주의에서의 변화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참여의 폭을 최대화하려는 민주주의는 본성상 끊임없이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더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늘 대면한다. 그렇기에 ‘군주정의 군주화’, ‘귀족정의 귀족화’는 말이 안 되지만,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변화의 본질을 집약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변화는 시간의 축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의 집합적 결과이다. 따라서 ‘시간성’temporality에 대한 이해 없이 좋은 변화론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1장의 주제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룰 수 있는 변화의 시간성’을 이해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장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말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의 변화와 그 궤적을 살펴볼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고 불렸던 정치체제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을 긴 역사적 지평 위에서 개괄해 볼 것이다. ‘2천5백 년 동안 면면히 흘러온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당황하겠지만,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실제 모습은 민주주의 이론만큼이나 파란만장했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기대를 현실화해야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래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환상 속에서 쉽게 냉소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제대로 된 길을 꾸준히 찾아가는 데 필요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다.
3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옹호할 만한 이유에서 시작해, 우리가 익히고 배워야 할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와 실천 규범을 살펴본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차이나 이견을 이해하고 다루는 데 있다.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차이와 이견을 다루는 실력만큼 민주주의는 성장, 발전한다.”라는 가장 기초적인 ‘민주적 테제’를 생각할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4장에서는, 민주주의는 우리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정치적 작품’이자, 시민이 필요로 하는 일을 책임 있게 대신하는 ‘정부의 문제’라는 점을 살펴본다. 시민이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다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정부도 필요하고 이를 감당할 정당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왜 정부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그런 정부가 목적을 상실할 경우 시민은 정부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와 관련해 민주주의 이론의 발전사를 따라가 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직적 책임성’, ‘수평적 책임성’, ‘책임 정부론’ 등의 중심 개념도 살펴볼 것이다.
5장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방식들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비민주적 실천의 사례를 이야기하게 도리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의 세 가지 중심 원리라 할 수 있는 참여participation, 대표representation, 책임accountability의 영역에서 나타난 오해들을 다룰 것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시민 참여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여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대표성과 책임성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6장에서는 좀 더 질 높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반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왜 결사체가 중요한지, 그 가운데에서도 좋은 노사 관계가 민주주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생산 체제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사가 각자의 이익과 열정을 추구하면서도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협력적 기반을 발전시켜야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있다. 노사 관계를 혁명이나 계급 투쟁적 관점으로만 보거나 반대로 뭔가 불순한 체제 전복적 행위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경쟁’ 내지 ‘갈등과 협력’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다룰 수 있을 때 좀 더 튼튼한 경제, 살 만한 공동체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관점이자, 그렇기에 어떻게든 우리 모두가 북돋아서 키워 가야 할 과제이지 않을까 싶다.
7장은 ‘진보-보수’와 같은 이념적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든 갖춰야 할 민주적 덕성 내지 정치적 이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체계나 구조, 제도와 같은 거시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행태나 문화와 같은 미시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를 강조할 것이다. 군주정이나 귀족정에서 강조하는 통치자의 덕목 못지않게, 민주정/민주주의 역시 좋은 시민적 기품이나 격조, 품성에 의존하는 바가 적지 않은 체제임을 이해할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8장에서는 ‘어떤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다른 민주주의론’과의 논쟁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부나 정당 대신 시민이 직접 민주주의를 운영해야 한다는 ‘직접 민주주의론’, 헌법을 바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헌정적 민주주의론’, 대의제와 같은 협소한 제도 정치 대신 운동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운동 정치론’, 민주주의는 정치가 중심이 아니라 사회가 중심이고 그런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시민 정치론’ 등이다. 이런 관점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착각’이며, 역설적이게도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대신 민간의 역할을 늘리고, 정치 대신 법치의 기능을 확대하고, 직업 정치가 대신 분야별 전문가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관’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권력 효과를 갖는다. 이 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9장은 정당과 민주주의 관계를 다룬다. 정치를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정치 개혁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요체는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드는 데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정당과 정치인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많은데, 엄밀히 말해 이들은 정당성의 원리에 맞게 헌법적으로 선출된 시민의 대표들이다. 이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이들이 맡은 일을 잘할 수 있게 해야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정치인들에게도 달라져야 할 점이 많다. 지나친 여론 동원 정치에 의존하는 것은 정치인 개인을 위해서는 좋을지 모르나 사회 분열과 적대를 조장하는 부작용이 크다. 제도 만능주의가 좋은 변화를 만들기보다 오히려 정치발전에 역행했던 점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정당 조직을 좀 더 유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열정을 공공 정책으로 연결하는 일에서 유능함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말할 것이다.
결론인 10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좀 더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중요한 이론적 함의를 갖는 책 다섯 권을 소개한다. 민주주의란 도달 가능한 완성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운명적으로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을 안고 싸울 수밖에 없다. 실제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늘 여러 민주주의‘들’ 사이의 논쟁으로 존재하고 또 그 속에서 각자의 민주주의관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드러내는데, 이 다섯 권의 책을 통해 필자의 민주주의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좀 더 효과적으로 객관해 보려 한다. 그것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쟁점들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논의의 수준은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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