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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식 수요 확대에서
슘페터식 공급 혁신으로
케인스주의를 넘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를 꼽는다면 케인스와 슘페터일 것이다. 이 중에서도 정부정책에 대한 영향력, 정부정책으로 채택된 면에서 보면 단연코 케인스다. 그동안 케인스 이론은 현실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한계와 문제점이 수없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저성장·경제불황을 극복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요시카와 히로시는 《케인스 VS 슘페터》에서 “(경제학) 이론의 세계에서는 케인스 이탈이 진행되고 있지만, 현실의 거시경제정책, 특히 금융정책이 케인스적인 재량정책에서 이탈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라고 단언한다. 30년 이상을 국가기획 업무에 종사하면서 거시경제정책을 다루어온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틀림없는 이야기다.
왜 슘페터보다는 케인스일까?
한마디로 정책 당국자, 관료들의 속성 때문이다. 슘페터는 ‘공급+중장기’ 이론이다. 케인스는 ‘수요+단기’ 이론이다. 그러고 보면 슘페터는 단기적인 불황 극복 이론을 제시한 적이 없는 듯싶다. 정책 당국자는 당연히 단기 대책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용 가능한 정책 수단도 공급 확대보다는 수요 진작이 더 많다. 정책 내용도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혼합하는 정책혼합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통화량의 팽창과 수축, 재정의 확대와 축소를 ‘계량적’으로 조정·제어하는 것이다. 계량적으로, 숫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따라서 국민들의 지지도 더 받을 수 있다. 케인스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팬시 케이크fancy cake’다.
반면에 슘페터는 불황이 별것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악이고 ‘자본주의에 이로운 찬물 벼락’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슘페터의 하버드 대학 제자들도 대부분 케인스주의자가 되었다. 새뮤얼슨Paul Samuelson, 솔로Robert Solow, 머스그레이브Richard Musgrave, 갤브래이스John K. Galbraith 등이 이에 포함된다. 슘페터의 이론은 수학의 뒷받침이 없는 서술식이어서 경제학을 과학으로 공부하던 많은 경제학자들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듯하다. 오히려 경영학을 공부한 피터 드러커 같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경영학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장기적인 정책 수단을 실행에 옮기는 정책 당국자, 관료는 찾기 어렵다. 공공선택 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뷰캐넌James McGill Buchanan, Jr.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과 정부관리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익을 좇는다. 재선을 노리거나 더 큰 권력을 얻으려고 하지, 항상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는 않는다.” 공공을 위하여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는 공인은 거의 없다. 개인적인 인성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관료들도 그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정치사회 시스템이 장기 대책은 용납하지 않는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의 영향이 클 것이다. 어느 정부든 임기 내에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 정책에 대해서는 관심과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다음의 그림을 가지고 좀 더 설명해보자. 정부는 정책성과가 좋지 않으면 1단계로 통제를 강화하고, 2단계로 전략을 수정하지만,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3단계로 나가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춰도 효과가 없으면 1단계로 금리를 더 낮춘다. 그래도 안 되면 2단계로 추경을 편성한다. 하지만 금융과 재정 정책이 아닌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3단계)은 하지 않는다. 생각을 하더라도 시도하지 않는다. 3단계는 신념 ·철학의 전환이며 장기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라는 대안
슘페터식 경제정책은 한마디로 기업자가 부단히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방식이다. 즉 기업가가 생산 요소들 간의 자유로운 신결합new combination,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활발히 할 수 있는 토대, 기업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슘페터는 기업가entrepreneur를 “생산의 3요소(토지, 노동, 자본)를 결합하는 일을 직분으로 삼는” (따라서 지주, 노동자, 자본가와 구별되는) ‘제4의 인격체’로 본다. “기업가는 신결합을 수행하는 경제주체이므로 일상 업무만 처리하는 경영자는 기업가가 아니다. 기업가가 움직이는 동기는 좁은 의미의 이득이나 금전 욕심이 아니라 ①사적 제국(자신의 왕조), ②승리의 의지(성공 의욕), ③창조의 기쁨 때문이다.”
요시카와 히로시는 《케인스 vs 슘페터》에서 슘페터의 경제발전 이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교차하는 앨프리드 마셜 이후의 분석도구에 익숙하다. 그러나 동학적 관점에서 보면 수요와 공급은 늘 명쾌하게 양분할 수 없다. 동학의 대상이 되는 변화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생산자 측에 있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신결합/혁신’이다. 5가지 신결합/혁신은 ①새로운 산출, ②새로운 생산방법의 개발, ③새로운 시장의 개척, ④새로운 원자재 공급원의 발굴, ⑤새로운 조직의 실현이다. 기업가는 신결합/혁신을 수행하고, 은행가는 자본가로서 권능을 제공한다.”
여기서 ‘신결합/혁신’을 수행하는 기업가란 실리콘밸리나 하이테크 기업의 기업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피터 드러커는 “발명가Inventor가 아닌 혁신가Innovator이어야 하며, 투기자가 아닌 기업가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상품·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반드시 포화한다’라는 명제는 케인스뿐 아니라 슘페터도 인정했다. 하지만 대책은 다르다. 케인스는 수요 부족을 주어진 조건으로 보고, 정부가 유효 수요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슘페터는 수요 포화상태의 상품·서비스를 대체할 새로운 상품·서비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혁신이 필요하고, 혁신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혁신이 계속되면 항구적으로 수요 포화상태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내 생각에 케인스의 주장이 투입으로 산출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물리학적 주장이라면, 슘페터는 투입과 산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생물학적 세계관에 가까운 듯하다.
슘페터는 재정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전향적으로 평가한 반면, 이자율 조정으로 거시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금융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이었다. 슘페터는 “불황이 악순환 구조에 빠질 위험이 있을 때 적절하고도 충분한 규모로 실행되는 정부 지출은 갑작스런 파국을 막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라고 말했지만, 불황기에 금리를 낮추는 것은 “정치적 의식a piece of political liturgy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까다로운 경제문제를 해결할 단순한 정책은 없다. 정부의 잘못된 경제계획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에도 틀림없는 주장이다. 정부는 ‘제4의 인격체’가 자유롭게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창조적 파괴’가 수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국민경제는 성장·발전하게 된다.
불황 탈출의 두 갈래 길
앞서 기술했듯이,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정부 경제정책의 근본 철학은 케인스 이론이었다. 하지만 구조개혁이 당면 과제인 지금 우리나라 경제에서 케인스식 정책은 효과 면에서 제약이 많다.
케인스 이론의 핵심은 단기 재정정책 또는 금융정책을 통한 총수요 관리와 완전고용이다. 케인스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과로 노동, 자본, 기술 등 공급 측 요인들은 안정된 반면 수요가 부족했다. 정부가 확장적인 재정·금융 정책을 통해 총수요를 자극하면 경기변동을 줄일 수 있었다. 케인스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 경제정책의 기본철학으로 채택되었다. 단기 정책이기 때문에 효과가 분명했고 이론적 토대가 탄탄하기 때문에 관료와 정치인들이 모두 선호했다. 특히 정책 내용과 효과를 숫자로 표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팬시 케이크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한계가 노출되었다. 석유파동으로 공급 부문에서 충격이 발생하여 물가가 상승하면서 금융정책을 쓰기 어려워졌고, 사회복지비 지출 증대로 재정 적자가 확대되어 재정정책도 구사하기 어려워진 가운데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통해 경제의 공급 능력을 효율화하고 확충하는 슘페터식 경제정책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정부들은 케인스식 거시관리정책보다 경제 전체의 구조개혁을 통해 공급 능력을 확충하는 장기 구조개혁 정책에 착수했다. 슘페터주의는 케인스주의와 달리 장기적인 경제 변동에 관심을 두어 정책 성과를 쉽게 인증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제시하지 못해 경제정책으로는 매력이 별로 없었다.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비로소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슘페터주의로의 전환, 구조개혁의 필요성은 특히 미국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에 꽃피우기 시작한 미국의 3차산업혁명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따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암울한 전망이 대세를 이루었던 미국 경제가 10년 후인 1980년대 중반에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 이 10년간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10년간은 미국의 ‘굴뚝 산업’이 거의 파멸의 궁지로 빠져든 시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역설적으로 이 기간에 미국에서는 폭발적인 취업인구 증가가 있었다. 서구에서는 이 기간 중에 300~400만 명의 취업인구 감소가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2400만 명의 취업인구가 증가했다. 심지어 당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일본보다도 취업자수 증가율이 2배나 높았다. 피터 드러커는 《혁신과 기업가정신》에서 이 시기를 미국이 ‘경영관리적 경제’에서 ‘기업가적 경제’로 현저하게 옮겨가고 있던 시기였다고 표현했다.
위 그림에서와 같이, 슘페터는 초과이윤 획득을 위한 기업가의 혁신 노력이 자본주의 발전의 운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경제에 새로운 노동과 자본 그리고 생산기술의 조합을 투입하는 것이 불황의 탈출구라는 지적이다.
슘페터는 케인스식 재정정책의 효과는 일부 인정했지만, 금융정책은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근본적으로 케인스식 단기 수요 창출 정책보다는 기업가의 혁신을 유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주장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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