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
근대 생산방식은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과로하는 소수와 굶주리는 다수를 만들어내는 쪽이다.
우리는 여태 기계가 등장하기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살아왔다.
이렇게나 어리석었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어리석게 살라는 법은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
1972년 스터즈 터클Studs Terkel이 미국 노동자 백여 명을 면담한 내용을 정리한 책 《일Working》은 미국인의 복잡다단한 삶의 단면을 놀라울 만치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이 엄청난 책에서 우리는 용접공, 웨이터, 택시 운전사, 주부, 배우, 전화 교환원이 일터에서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일상 경험을 듣는다. 터클은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해, 노동시간을 견뎌내려고 시도하는 사소한 대응 전략, 그러니까 짓궂은 장난이나 공상, 그밖에 정신적 거리두기 전략 같은 것을 다룬다.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는 주부에게 치근대면서 시간을 때우는 가스검침원. 발레리나인 양 테이블 사이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며 빠르게 하루를 흘려보내는 식당 종업원. “젠장!” 하고 소리치고는 허락 없이 일손을 놓고 쉬는 생산라인 노동자. 《일》에 담은 면담 내용을 한 걸음 물러나 되짚어보며, 터클은 이렇게 말한다.
주제가 일인 이 책은 바로 그 속성상, 몸과 마음에 가하는 폭력을 다룬다. 궤양, 사고, 입씨름과 주먹다짐, 신경쇠약, 심지어 지나가는 개를 걷어차는 행위까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매일 되풀이되는 굴욕을 이야기한다.
터클은 일이 곧 폭력이라는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연을 책에 담았지만, 짧게나마 일하는 기쁨을 드러내는 사례도 있기는 하다. 그중에서 자기 작업을 예술적 행위로 묘사한 피아노 조율사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조율사는 자신이 거의 최면에 가까운 집중 상태에 빠져드는 과정, 피아노 음이 조화를 이룰 때 느끼는 심미적 기쁨을 설명한다. 이 이야기에서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의 “몰입 상태”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작업 과제가 작업자가 가진 관심과 기술 수준에 걸맞을 때, 작업을 하면서 더없이 행복한 몰입감에 완벽히 빠지는 심리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몰입한 작업자는 시공간을 느끼지 못한 채 오직 작업에만 집중한다. 자기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해 그저 시곗바늘만 쳐다보는 지루한 노동자가 겪는 상황과 정반대다.
터클이 소개한 피아노 조율사가 누리는 기쁨은 뭇사람에겐 낯선 즐거움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과 일에 만족한다는 것은 크게 다르다. 작업장을 구성하고 통제하는 최신 기술에 시달리면서 사회적 효용이 뚜렷하지 않은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일이란 지루함, 무의미함, 피로에 맞서는 투쟁일 때가 많다. 노동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이 지금 하는 일보다는 더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되뇌거나, 머릿속으로나마 상사나 고객에게 저항하는 상상을 하거나, 냉소주의의 껍질 속으로 숨어버리는 등 다양한 개인적 전술을 활용한다. 업무가 끝난 뒤에는 일을 잊으려고(생활상담사들이 말하는 ‘균형 회복’을 위해) 공들여서 탈출구나 보상기제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 책 후반부에서는 일이란 외부에서 자신의 삶에 가하는 강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소개할 것이다. 그들은 일을 통해 자신이 어떤 ‘압박’, ‘통제’, ‘강요’를 당했는지 이야기한다. 그들은 일을 할 때면 ‘뒤에서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거나 ‘공장식 양계장의 닭처럼 우리에 갇힌’ 기분, 또는 ‘거대한 짐승에게 지배당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자기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아니면 앞으로 강요당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참여자 중 유일하게 20대 중반인 매튜는 나중에 잡화점이나 사무실에서 일할 생각을 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고 말했다. 불안해하는 그 모습에 나는 터클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말을 떠올렸다. “직업은 사람의 영혼을 담을 만큼 큰 그릇이 못됩니다.”
물론, 일에 대한 저항이 없지는 않다. 활동가와 노동 분야 학자들은 공정한 임금, 보다 나은 업무 환경, 보다 민주적인 직장 내 관계형성이 절실하다고 꾸준히 주장한다. 중요한 의제들은 기존 노동조합과 좌파의 정책 속에 담겨 있다. 모두 매우 시급한 의제인 데다 성과를 내려면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노동자 권리를 넘어서 더욱 폭넓고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할 준비도 해야 한다. 사회가 일자리를 계속 더 많이 만들어야 할 만큼 일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일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더 이상 평생 일하며 살라는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면 그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일이 갖는 의미와 목적, 미래에 대한 이런 질문은 잘 다져내려온 비판적 사상사의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학문 영역 바깥에서는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던지려면 흔히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진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에 임하는 태도와 상관없이 그저 어떻게든 주어진 일을 해내도록 강요당하는 입장에서는 일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봤자 얻을 게 없다고 느낄 것이다. 일자리 수요가 대단히 높은 사회에서 일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거나 엘리트주의적 태도로 취급당할 수 있다. 빈곤과 고실업에 고통받는 지역이라면 일을 줄이기보다 늘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할 사상가들이라고 결코 그런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일할 필요를 매우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두고 논쟁할 이유는 없다. 정작 논쟁을 해야 하는 문제는 발달한 산업사회 속 문화적, 윤리적, 정치적 삶에서조차 일이 중요하다고 칭송하는 점이다. 일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취미나 여타 활동, 사회 기여에 비해 직업 활동에 여전히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 중심 사회
우리가 일 중심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사실이다. 일은 무엇보다도 사회가 소득을 분배하는 주요 기제다. 따라서 일은 의식주 같은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핵심 통로일 뿐 아니라 현대 소비주의가 제공하는 상업적 유희이자 도피처다. 우리가 온전히 일에 투여하는 시간만 따져도 일 중심성이 드러난다. 일을 하기 위한 준비, 훈련, 탐색, 고민, 그리고 일을 찾으려 하나 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행에 들이는 시간까지 모두 더해보면 말이다. 일은 또 대다수에게 가족을 제외한 사회생활에서 핵심 영역을 차지한다. 부유한 사회에서 일은 타인이 사는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가장 일반적이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유급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또한 성인이 되는 통로로서, 아이가 자란 뒤 독립해서 ‘진정한 세계’(젊을 때 품은 야망은 잊고 그저 죽어라 일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이해한다는 표식이다. 부모나 교사가 직업적 포부를 심어주고 고용 가능성을 키우도록 유도하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정체성을 직업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 일 중심 사회는 젊은이들을 미리 정해둔 직업적 역할에 제대로 안착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가장 손쉽게 용인한다.
사회가 저마다 성공을 측정할 방법을 갖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부유한 나라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일을 통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주로 (일을 하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끔찍한 질문인)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 질문이 ‘어떤 직업을 갖고 계셔요?’를 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직업을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취급하는 경향은 별로 달갑지 않은 직업을 미화할 때 자주 쓰는 현대의 어설픈 완곡어법에서 드러난다. 청소부는 ‘폐기물 및 위생 관리’ 작업을 하고, 튀김 담당 요리사는 ‘조리부의 일원’이며, 실업자는 ‘구직자’로 부르는 식이다. 이 기이한 현대적 어법을 일별하면서, 터클은 이런 용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꼭 자기가 하는 일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직업으로 지위를 측정하려들며 자기를 희귀종으로 바라보는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정당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일은 분명 경제적 필요와 사회적 의무를 넘어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 부유한 사회에서 일은 어떤 정체성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일은 개인 성장과 성취 도구로서 가치를 부여받고,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얻는 수단으로 확립된다. 대개 사적 이익을 얻는 것이 일이 갖는 근본 기능이기는 해도, 일이 위와 같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일이 문화 수준의 중심부를 드러낸다고 한다면, 정치 수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영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 신노동당이 ‘일-생활 균형’에 보인 피상적 관심을 빼면 노동시간 문제나 일 바깥에서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삶을 주도해나갈 시민 권리 부여 같은 의제는 주요 정치 의제에 담기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주류 정치는 일자리 창출과 고용 가능성에만 노력을 쏟으며 일이 존엄하고 신성하다는 기존 신념을 꾸준히 부추기고 있다. 실업을 도덕적으로 다루는 논의에서 이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는 특정 지역에 대량 실업이 집중적으로 이어지면 더 이상 실업률을 ‘실패나 죄책감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없어’ 실업자에 대한 낙인찍기가 사라질 것이라했다. 그러나 오페는 잘못 짚었다. 신자유주의가 ‘부지런한 노동자’라는 미덕과 이른바 식충이나 게으름뱅이라는 관념을 대비시키는 쪽으로 이념적 관심을 집중시켜 일이 갖는 도덕성을 강화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노동자인가, 놀고먹는 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도덕적 구분선을 그은 것이다. 최근 사회정책은 효용성을 그토록 의심받으면서도 일을 강요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기능이라 보고, 일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데 주력해왔다. 점차 엄격해지는 회계 처리로 인해 비노동자 처벌이 늘면서 최근 복지 체계는 분해 단계에 접어들었다. 시민이 누리던 복지 혜택을 제거하고 일터로 내몰려는 흐름 속에서 심지어 기존에 일할 의무를 면하던 한부모나 장애인 같은 집단도 검토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이 유급노동 외 다른 활동을 통해 생활양식을 개발하려는 의지를 꺾는다. 사회학자 캐서린 케이시Catherine Casey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정리한다.
고용상태인지, 구직 중이거나 준비 중인지, 무엇보다도 자기 직업을 좋아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 형태의 일은 산업사회에 사는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 캐서린 케이시, 《일, 자아, 사회Work, Self and Society》(1995)
이 장에서는 삶의 핵심이자 당연한 요소라 여기는 일을 탈자연화하는 작업으로 이 상황을 마주할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만약 실제로 일이 사회성, 권리, 지위, 소속감을 주는 핵심 요소라면, 이 상황은 사회 역사적 구성물이지 자연 질서를 부분적으로 교정한 결과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여기서 쓰는 일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일 비판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미리 밝히려 한다. 뒤이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 갖는 핵심 역할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형성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일이 발생한 과정을 기록한 기존 연구를 가볍게 살펴볼 것이다. 말미에서는 노동시간을 급진적으로 단축하자고 제안하면서 일 중심성에 도전한 주요 학자를 소개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들의 독특한 시선 속에서, 인류가 자율성을 갖고 보다 풍요로우며 다채로운 삶을 일구는 데 있어서 일은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 역할로 바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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