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미국제국이 붕괴하고 그 먼지도 완전히 가라앉은 후, ‘탈脫미국 시대’의 관점에서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면, 미국문명은 어떤 모습으로 회고될까. 역사가 월터 맥두걸은 “지난 400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미합중국의 건설이다”라고 쓰고 있다.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미국이 정말로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어디를 보아야 할지만 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2040년 혹은 2050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맥두걸을 위시하여 데이비드 포터,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외에도 몇몇 중요한 역사가들이 지적하듯이, 미국은 그 시작부터가 비즈니스 문명이었다. (중략) 역사가 리오 마르크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심지어 16세기에도, 미국의 시골지역은 말하자면 부동산 개발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업적 성향은 실제로 우리 미국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북아메리카 문명과 그 거주민들의 가장 주된 목표는, 무한히 확장하는 경제(풍요)와 끝없는 기술혁신(‘진보’)이며, 이것은 언제나 그랬다. 맥두걸은 (미국은) ‘허슬러’(10쪽 참고)들의 나라, 이익을 보려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쓰고 있다.1
물론 본질적으로는 도덕적 혹은 ‘영적’인 성격의 다른 전통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요컨대 풍요의 추구를 천박한 목표로 보고, 그것은 참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그게 무엇이든 이 나라가 갖고자 희망할 수 있는 정신적 목적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보는 전통이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미국에는 이런 다른 전통의 주창자들도 적잖이 존재해왔다. 존 스미스 선장으로부터 지미 카터 대통령 같은 이들이다. 이런 전통은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과 중복된다. 고전적 공화주의는 사치에 반대하고, 노골적인 사리사욕(‘부패’)이 아닌 공익에 봉사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 실제로 다수의 역사가들은 바로 이런 전통이 미국혁명의 이념의 중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수사修辭와는 반대로 실제 행위에 있어서 청교도주의나 공화주의는 주류전통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안적 비평가들은 특히 독립전쟁 이후에 미국의 전반적 ‘진로’를 바꾸지 못했다. 우리는 이 ‘진로’의 압도적인 힘 ― 운동량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지난 100년간의 자유방임주의 경제에 대한 두 차례의 거대한 ‘경고’, 즉 1929년과 2008년의 폭락에 대한 반응이 그것이다.
(중략)
맥두걸이 잽싸게 지적하듯이, 허슬링2 또는 기회주의에도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야심, 혁신, 근면, 조직 그리고 미국인들의 ‘할 수 있다’ 정신은, 이 나라가 건립되고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전세계 공산품의 3분의 1을 생산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것이 결코 하찮은 성과가 아니라는 점에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바로 이어지는 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주류전통(미국사회를 지배해온)은 오히려 미국인들에게 해를 끼치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컨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은 앞선 시대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보인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불행한 개입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팽창주의적 정신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할리버튼, 블랙워터, CACI, 타이탄 같은 기업들이 제국주의적 투기를 통해 획득한 어마어마한 부당이득은 입증된 사실이다. 엔론에 만연했던 분식회계 같은 사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실상 많은 미국 기업들이 갖고 있는 고질병이다. 무자비함이나 속임수, 한없는 방종을 거의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경영자라면 누구나 미국에서 사업의 사활은 정말이지 사실 바로 그런 행위들에 달려 있다고 말할 것이다(물론 비공식적으로). 이런 것은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민주당 소속의 볼티모어 시장 실라 딕슨이 자신의 전자제품 장난감들을 사기 위해서 빈곤가정을 위해 할당된 예산을 유용한 사실을 발견한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딕슨이 유죄판결을 받은 후에도 뉘우치지 않고, 볼티모어 시민들에게 사과하지도 않고, 심지어 시장직을 사임한 뒤에는 8만 3,000달러에 달하는 연금까지 타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메릴랜드 주검사는 딕슨이 부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현실감각을 잃었다”면서 분개하였다. 그런데 무슨 현실 말인가? 그녀의 행위는 미국경제가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원리가 아주 조금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이것도 허슬링 아닌가.
테크놀로지와 ‘진보’ ― 엄밀히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 는, 물론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적 확장의 핵심은 끝없는 기술혁신이라고 보았는데, 그는 이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제 우리는 파괴가 창조를 훨씬 능가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상황은 ‘진보’를 오직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만 정의定義한 결과이다. 한편,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잃고 있는지 이해하기란 어렵다. 마흔일곱 가지(정확한 수인지는 모르겠다) 종류의 면도날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진보일까? 친구들끼리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중 반수 이상이 저녁 내내 서로가 아니라 휴대전화에 대고 얘기하게 된 상황(그것도 대개는 식탁에 앉은 채로)이 진보란 말인가? 아니면 월마트에 쇼핑하러 온 사람들이 할인된 DVD플레이어를 손에 넣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을 짓밟고 넘어가고, 그러고는 의료진이 도착했을 때에는 의료진에게 길을 비켜주지 않는 상황이 진보인가? 만일 이런 것들이 진보라면, 우리가 얼마나 더 이것을 견딜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허슬링을 절대 포기하지 않듯, 진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는 애초에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다. 현대기술은 중독성이 몹시 강하고, 허슬링 정신구조와도 매우 잘 들어맞는다. ‘창조적 파괴’라는 표현은 현대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문명은 소비에트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라는 오랜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그 적敵과 실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우리 자신의 체제 또한 사회주의인 것이다. 물론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기업이나 극히 부유한 이들에게는 그렇다. 정부가 대부분의 거래를 하는 대상은 바로 이들이며,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 랠프 네이더(혹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기업 복지 자본주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한편 이슬람사회를 보면, 우리와는 정말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슬람사회는 전통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알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이슬람사회에서는 종교가 최우선이고, 그래서 이 사회들은 의미 있는 공동체적 토대를 갖게 된다.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는 소프트파워 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진보 개념을 이들 사회에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뿐이다. 그리고 1861년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북北이 남南에 행했던 것은 바로 정확히 그것이다(4장을 보라). 이슬람사회가 억압적이고, 여성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며, 지적으로 정체된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환대라는 자비로운 규칙을 갖고 있으며 가족과 공동체, 충의忠義를 특별히 중시한다. 글로벌 경제로 인해 이슬람사회는 극단적인 풍요와 빈곤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이슬람의 에토스에 ‘허슬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혁신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이들 전통적 사회, 예컨대 이라크나 이란 혹은 아프가니스탄 같은 사회들을 완전히 지배하거나 정복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뇌가 반만 있어도 누구나 알겠지만, 완벽한 바보짓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서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남부에게 행했던 일을 우리는 문화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이슬람 세계에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어찌 될 것인가. 나의 추측으로는 그들은 아마도 적응을 해서, 많은 것(그 대부분은 우리가 시작한 게임에서 우리를 패배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다)을 우리에게서 배울 것이다. 한편 우리는 매우 둔감하고, 심지어 외국(인) 혐오증까지 갖고서 우리 자신의 생활방식이 최고라는 확신에 찬 나머지, 저들의 문화에서 배울 가치가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모조리 무시할 것이다.
이 모두를 차치하고, 이제 미국의 대안적 전통의 앞날에 대해서 논해보자.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할 것도 없이 그 미래는 없다. 왜냐하면 허슬링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공공에 대한 봉사(직업의 형태가 아닌)에 헌신적인 미국인은 아마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예기술, 공동체, 공익, 자연환경, 영성적 활동, ‘간소한 생활’ ― 워즈워스의 표현에 따르면 “소박한 삶과 고매한 사고” ― 의 추종자가 있어왔다고 해도, 셰이커나 아미쉬 같은 주변부 유토피아 공동체의 예를 제외하면, 주류문화에 쉽게 흡수되거나 그리고/또는 일시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유행이나 추세로 변질되었다(비근한 예를 들자면, 마사 스튜어트의 ‘미디어 제국’은 가정(생활), 단순함, 수작업의 이점을 상업화하여 성립하였다). 얄궂게도 공화주의조차도 ‘허슬링 라이프’에 봉사하도록 강제되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 좋은 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느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미국에서(남부를 제외하면) 정치적 형태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전개가 가능할지도 모를 단 하나의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지배적 문화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고, 가게에서 식료품이 사라지고, 병원과 공항들이 폐쇄되며 전력망이 차단되는 상황이 온다면 틀림없이 군대가 거리 순찰을 돌 것이다. 하지만 군대의 규율마저 붕괴된다면 어떻게 되나? 정부가 모든 도시의 모든 거리를 통제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군인들도 결국에는 사람이지 않은가. 군인들도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집단으로 탈영할 수 있다. 이런 전후사정에서는 전자기기나 은행예금이 얼마나 많은지 따위는 별 소용이 없어질 것이며, 과시적 소비는 우스꽝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이런 삶의 방식의 공허함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해져서, 대안적 전통의 가치들이 단기간의 유행이나 사교계의 좌익 기호嗜好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방정부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이러한 가정들은 좀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2008년은 결코 우리가 겪을 경제적 위기의 마지막도 아니고, 가장 심각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문명의 끄트머리에 와 있다. 2040년에는 ― 어쩌면 2025년에도 ― 세상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애석한 (또는 엄청나게 좌절감을 주는) 일은, 미국 역사 속에서도 삶의 진정한 의미, 진정한 가치 같은 것들은 항상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허슬링과 기술혁신의 이점들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문제는 균형이다. 즉, 인간 삶의 총체적 목적 혹은 ‘도덕적 생태학’ 속에서 허슬링이나 기술혁신 같은 것들이 어디에 맞아들어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이것들이 삶의 목적이 된다면, 그렇다면 정의定義 그대로 삶은 어떠한 목적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보다 많이’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자문단 중의 한 사람이, 미국의 특징을 ‘목표가 없는 목표 지향적 사회’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1630년에 영국에서 미국을 향하는 아라벨라호 선상에서 존 윈스럽이 한 유명한 설교에서, 그가 말한 ‘언덕 위의 도시’는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던 것일까? 매사추세츠주 초대 총독이었던 존 윈스럽은 1630년 잉글랜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식민지를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모범적인 이상사회인 ‘언덕 위의 도시’로 만들 것이라고 설교한다.(역자)
그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허슬링도 아니고 재화도 아닌, 선善 ― 공익, 즉 “공공의 선이 모든 사익私益에 우선한다”는 점을 경계해서 지켜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우리는 그 길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했고,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2011년, 멕시코에서
모리스 버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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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군인, 작가. 북미 최초의 영국 식민지 제임스타운을 건설했고 버지니아 식민지 지도자로서 미 대륙을 탐사했다.(역자)
2 ‘허슬hustle’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기나 강탈 등의 수단을 주저 없이 사용하는 행태를 나타내는 말인데, 저자는 이 단어를 하나의 용어로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책에서는 그대로 ‘허슬링hustling’, ‘허슬러hustler’, ‘허슬링 라이프hustling life’ 등으로 옮기기로 한다.(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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