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_ 조선총독부 이전
경복궁 잔디밭과 일제의 공간정치
조선총독부, 이전하다
1926년 1월 7일, 남산 기슭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있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에 새로 지은 청사로 이전했다. 1915년 가을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직후 새 청사를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일제는 한국 강점 5주년을 기념하여 식민 통치의 성과를 내외에 널리 알린다는 구실로 오늘날의 산업박람회에 해당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장소는 경복궁으로 정했는데 이때 이미 총독부 신청사 건물을 경복궁 앞에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던 경복궁이 갖는 상징적·문화적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표상하는 경복궁과 일제의 식민 통치를 표상하는 새 총독부 건물이 한 시야視野에 포착되기를 원했다.
남산 기슭에 모여 살던 일본 거류민들 중에는 총독부가 자기 동네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반발은 총독부를 조선 전체의 중심부로 옮기는 데 따른 정치적·문화적 실익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두 시설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두 체제의 장단점을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도 즉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여겼다. 조선 건축 기술의 정화精華를 담은 경복궁조차 총독부 신청사의 위용威容에 비하면 하찮게 여겨지리라는 것, 그리하여 조선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문명적 성취라는 것이 일본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얼마나 볼품없는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 일제가 총독부 신청사 장소를 경복궁 앞, 정확히는 경복궁 경내로 정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점을 노린 조치였다. 원주민의 것을 야만의 위치에, 식민지 지배자의 것을 문명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원주민들의 잠재의식 안에 모멸감을 심어주고 감사와 동경의 눈으로 제국주의를 대하게 하려는 상투적인 ‘공간정치’ 기법이었다.
식민지 도시 공간, 문명과 야만을 대비시키는 무대
17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는 6세기에 지어진 이래 비잔틴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던 성소피아 대성당 바로 옆에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일명블루 모스크를 지어 올렸다. 모양은 똑같이 했으나 크기는 1.5배 키웠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우열愚劣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려는 얄팍한 시도였다. 알면서도 속게 만드는 것이 시각視覺인지라 이런 시도는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역사’를 지닌 식민지 도시 공간들에서 흔히 이런 수법을 썼다. 식민지 도시 공간은 문명과 야만, 선진과 후진의 표상들이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식민지 원주민들 스스로 버려야 할 것과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장치였다. 제국주의 지배 하의 식민지 도시 공간은, 원주민의 문화적 자존심을 짓밟고 그들을 제국주의를 동경하는 신민臣民으로 주조鑄造하기 위한 기계였다.
그런데 일제는 본래의 건물과 시설을 그대로 두고 그 옆에 ‘자기들 것’을 세우는 단순 비교 기법이 아니라, 본래의 것을 축소시킴으로써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격차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썼다. 아마도 ‘조선 전래의 것’과 ‘일본 전래의 것’ 사이에 본래 격차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경복궁 전각 대부분을 헐고 그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지었으며, 경운궁 전각 대부분을 헐고 그 앞에 경성부 청사를 지었다. 대한제국의 성소聖所이던 원구단은 헐었지만 그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는 그대로 둔 채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한국인들이 신성하고 존엄한 장소로 여겼던 곳들을 일부러 초라하게 만든 뒤, 그 옆 또는 그 앞에 제국주의 지배 문명의 상징물들을 세웠던 것이다. 이 방식은 일제가 공공시설을 세우는 공식公式이었다.
경복궁 잔디밭, 일제 공간정치의 노림수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경복궁을 개조한 방식은 일본 제국주의식 공간정치의 전범典範이었다. 일제 권력은 경복궁을 경복궁이되 경복궁이 아닌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경복궁으로 인지되면서도 새 총독부 청사에 비해서는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사실이 확연해야 했다.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장을 경복궁 경내로 정한 것은, 이를 핑계로 경복궁의 규모를 ‘적절히’ 조정하기 위함이었다. 총독부는 경복궁을 공진회장으로 개조하면서 대다수 전각을 헐어버리고는 그 터 일부에 가건물들을 지었다. 50여 일간의 공진회 행사가 끝난 뒤, 미술품진열관만 박물관으로 전환시키고 나머지 가건물들은 모두 헐었다. 총독부 신청사 건립 공사는 그 직후 시작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강녕전과 교태전도 1918년 창덕궁 화재 복구공사 자재로 쓴다는 명목으로 헐었다.
일제는 경복궁 전각을 헐어낸 자리에 빠짐없이 잔디를 심어 표시해두었는데, 이 ‘잔디밭’은 한국 궁궐의 이미지를 변환하기 위한 장치였다. 일제 강점기 창경궁과 덕수궁에서도 전각이 있던 자리는 모두 잔디밭으로 변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잔디밭을 궁궐에 필수적인 시설로 잘못 인지하고 있다.
잔디는 한자로 사초莎草라 쓴다. 요즘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조상 무덤의 잔디를 갈아주는 일은 ‘개사초改莎草’라고들 한다. 아주 옛날부터 한국인들은 ‘사’라는 글자에서 죽음과 불길不吉을 떠올렸다. 4를 F로 바꿔놓은 엘리베이터는 부지기수이며, 병원처럼 죽음과 가까이 있는 건물들은 3층 다음에 바로 5층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격리시키는 점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미국과 유럽, 심지어 가까운 일본의 도시들에서도 마을 한 귀퉁이에 들어선 공동묘지를 쉽게 볼 수 있지만, 한국 도시에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시설은 극단적인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풀인 사초, 즉 잔디는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에만 심는 풀이었다. 산 사람이 사는 집에 잔디를 심는 것은 금기였다. 지방의 문화재급 한옥에만 가 보아도, 마당에 잔디 심는 것이 우리 전래의 문화가 아님을 쉬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무덤이 된 옛 궁궐
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참관한 사람이 160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했다. 당시 한국 인구의 10퍼센트 가까이가 이 행사에 동원된 셈인데, 그들이 옛 궁궐 전각 자리에 새로 들어선 웅장한 가건물들과 초라해진 경복궁을 비교하면서 무엇을 떠올렸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된 뒤에도, 경복궁은 무슨 축산대회니 박람회니 하는 총독부 주최 행사의 단골 개최지로 사용되었다. 1926년 서울에 온 미국 관광단은 조선 건축 예술의 걸작인 경복궁을 가로막은 총독부가 눈에 거슬린다고 했지만(《동아일보》 1926/11/29), 조선 전래의 건축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총독부 뒤편에서 전각 몇 채 안 남은 채 퇴락해버린 경복궁이 더 거슬리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궁궐의 옛 전각 터에 조성된 잔디밭들에서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무덤을 연상했다. 잔디에서 바로 무덤을 떠올리는 한국인들의 의식 안에서, 궁궐 안의 잔디밭은 곧바로 ‘왕조의 죽음’과 연결되었다.
일본 국가권력은 메이지유신 이후 도쿄의 옛 다이묘 저택들을 헐어 공원으로 만들 때에도 잔디를 심었다. 그러니 한국의 옛 궁궐터에 잔디 심은 짓을 꼭 악의惡意의 소산이라고 단정할 것까지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은 대한제국 황제를 일본 막부시대의 일개 번주藩主보다 약간 높은 급으로 대우했다. 일본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미 다이묘들의 저택에도 했던 일이니 대한제국 황제의 저택에 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을 강점하기 전부터 치밀하게 한국인들의 모든 관행을 조사했다. 그들은 토지 경작 관행, 상거래 관행, 상속 입양 관행, 관혼상제 관행, 장묘 관행 등 한국인들의 ‘문화와 관습’에 관한 정보를 전면적으로 수집·축적했고, 그 정보들을 한국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지배력을 확장하는 데에 이용했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 문화에서 잔디가 점하는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 궁궐 마당에 잔디를 심은 것은, 이 풀이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한 짓이었다.
한국인의 유별난 잔디 사랑, 그러나 …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잔디에서 무덤을 연상하던 문화는 점차 소멸해갔다. 오히려 잔디와 궁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상만 강해져, 잔디가 궁궐 마당의 필수 요소인 양 여기게들 되었다. 잔디를 애호하는 서구 문화가 확산된 것도 잔디의 세속적 지위를 높이는 데 크게 한몫했다. 1930년대부터 일부 ‘문화주택’의 마당을 점거하기 시작한 잔디는 해방 후에는 아예 부잣집의 상징처럼 되었다. 잔디로 뒤덮인 마당 한구석에 작은 그네와 가족용 야외 테이블이 놓인 벽돌집은 1960~70년대 꿈의 주택이었다. 1970년대에 크게 유행한 대중가요 〈님과 함께〉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 초원이 필경 ‘잔디로 된 초원’일 것이라 상상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잔디’ 사랑은 끝을 모를 지경이다. 근래에는 어지간한 산마다 온통 잔디로 덮인 골프장이 들어섰고, 심지어 강변에도 ‘금모래’ 대신 ‘금잔디’가 널렸다. 손바닥만 한 빈터라도 있으면, 그예 잔디를 심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 ‘그린Green’은 곧 잔디다. 한 세기 전의 사람이 본다면 나라 전체가 무덤이 되었다고 탄식할 일이다. 시대가 변하면 표상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잔디의 표상이 달라진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일제 권력이 조선의 궁궐을 잔디로 덮은 의도를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다만 잔디가 있어야 할 자리와 있어서는 안 될 자리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잔디가 이 산 저 산 파먹어 들어가는 것도 흉물스럽거니와, 모래밭이나 자갈밭이 있어야 할 강변이 잔디로 뒤덮인 것도 ‘자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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