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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은 시각, 박정기의 동생 박월길과 박종부는 부검을 참관하기 위해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이동했다. 경찰은 어젯밤을 넘기지 않고 박종철의 주검을 화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환 검사의 노력으로 부검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문사를 직감한 최환은 외압을 물리치고 사체 보존 명령을 내렸다. 사건의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경찰은 처음엔 ‘쇼크사로 판정 난 사체를 무엇 때문에 부검하려 하느냐?’며 버텼고, 나중엔 부검을 경찰병원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면 사인을 왜곡할 여지가 높았다. 부검 장소는 최환의 제안에 따라 한양대병원으로 결정되었다.
박종부는 부검을 막으려는 경찰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 박정기는 부검에 반대했다. 죽은 자식을 왜 또 죽이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부검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박종부는 아버지 몰래 부검 현장에 갔다. 안상수 검사가 말했다.
“친형이 보는 것보다 삼촌이 참관하는 게 낫겠습니다.”
박월길이 참관인으로 들어가고 박종부는 건물 바깥에서 기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 등 의사 세 명과 박월길이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부검을 마친 뒤 황적준은 안상수에게 말했다.
“질식사입니다. 물고문 같습니다.”
삼촌 박월길이 부검을 참관하고 나오자 박종부가 담배를 내밀었다. 박월길이 담배를 한 모금 내뿜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저놈들이 종철이를 죽였어!”
고문사가 확실했다. 박종철의 맨몸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온몸에 피멍 자국이 많아. 두피에도 피멍이 있고, 두들겨 맞은 흔적이 많아.”
예상한 대로였다. 대공분실에서 고문이 없을 수 없었다.
“상처 부위를 보니 전기 고문이 있었던 거 같아.”
박월길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는 부검 결과와 달리 전기 고문이 있었으리라고 판단했다. 부검의 황적준은 이때부터 경찰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급한 불(기자회견)부터 끕시다. 보고서를 ‘심장 쇼크사’로 작성해 주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경찰은 허위 보고서 작성을 요구했다. 황적준은 갈등했다. 박종철의 죽음이 고문사가 될지, 쇼크사가 될지는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황적준은 16일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날 밤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의로운 아빠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고 말했다. 1년 뒤 그는 그때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 내용을 기록한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한다. 이로 인해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된다.
1월 14일 오전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 현장을 가장 먼저 목격한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도 16일 언론을 통해 용기 있는 증언을 한다.
조사실에 도착했을 당시 박 군은 바지만 입은 채 웃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
그의 증언은 박종철의 사인이 심장 쇼크사가 아닌 물고문임을 암시했다. 의사들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박종철이 고문사한 사실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사건은 보도 지침으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1월 16일부터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첫 보도를 한 『중앙일보』에 이어 19일자 『동아일보』는 박종철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기자들은 안기부 등의 외압에 맞서며 사건을 추적했다.
경찰은 자체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론이 비등하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직접 발표했다.
(1월 14일) 10시 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
그날 경찰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 등장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표현은 박정기 앞에서 재연할 때 했던 말 그대로였다. 고문 사실을 감추기 위한 이 말은 이때부터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 시절, 고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문 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두 해 전부터였다. 1985년 고 김근태(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는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에서 고문 기술자들에 의해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의 폭로로 고문 기술자 ‘김 전무’(이근안)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7년 실형을 마치고 나온 뒤 목사로 변신한 이근안은 몇 해 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문을 ‘고문이 아닌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1986년엔 서울대 휴학생 권인숙이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경기도 부천의 한 공장에 위장 취업하면서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쓰고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는 문귀동 형사에 의해 이틀에 걸쳐 가혹 행위와 성 고문을 당했다.
해마다 터진 고문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삽시간에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박정기는 정년 퇴임을 1년 남짓 앞두고 부산시장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말단 공무원 생활 30여 년 만에 시장실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장은 ‘아들 단속’을 주문했다.
“박 선생도 어렵게 자제가 그 좋은 대학을 갔으니 학업에 열중하라고 꼭 가정에서 타이르시오.”
에둘러 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누구가 데모하는 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국장 진급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텔레비전만 켜면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과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의 모습이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종종 아들의 입학식 때 본 서울대 정문도 보였다. 서울대는 시위가 가장 빈번한 학교였다. 박정기는 화면 속의 학생들 중에 혹여 아들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학생운동을 하며 마포경찰서를 드나들던 큰아들과 달리 막내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종철이 이른바 ‘운동권 학생’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만난 뒤 한 번 더 다짐을 받아 두었다. 아들은 그를 안심시켰다.
1월 15일 오후 석간신문에 첫 보도가 나간 뒤 기자들이 경찰병원 영안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분향실에 들어서려 하자 경찰관들이 막았다. 기자 한 명이 분향실을 향해 소리쳤다.
“안에 유가족 누구 없습니까?”
박은숙이 대답했다.
“여기 있어요. 들어오세요.”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박은숙과 기자들이 얘기 나누는 도중 박정기가 나타나 기자들에게 외쳤다.
“뭘 알고 싶소? 왜 죽었는지가 궁금한 기요? 내 아들은 못돼서 죽었소.”
기자 한 명이 박정기에게 되물었다.
“아드님이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
“이놈의 세상에선 똑똑하면 못된 기죠. 내한테는 아들이 또 하나 있는데 그놈도 아주 못된 놈이요.”
박종부는 응급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죽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밤 10시 무렵, 박정기는 박종부와 함께 염을 준비했다. 이튿날 아침 화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카세트에 테이프를 꽂았다. 천수경이었다. 선친 박영복이 어린 딸 정옥을 보낼 때 그랬듯, 박정기는 제 손으로 자식의 옷을 수의로 갈아입히고 베로 감쌌다. 그는 염을 하는 동안 천수경을 외웠다. 독경 소리가 영안실 가득 울렸다.
그는 부검을 마친 아들의 몸을 염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씻길 때처럼 정성을 다한 몸짓이었다. 그것은 아비로서 아들을 보내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다.
다음 날인 1월 16일 오전 8시 25분, 박정기는 아들 박종철의 주검을 실은 경찰병원 장의 버스를 타고 영안실을 떠났다. 버스가 출발할 무렵 기자들이 다가와 가족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들이 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위협해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화장터 가는 길엔 겨울비가 내렸다. 벽제화장터에서 관을 내릴 때 아내 정차순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쓰러졌다. 경찰들이 대기 중이던 구급차에 정차순을 실었다. 딸 박은숙이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구급차에 탔다. 박정기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는 아들의 영정을 앞에 두고 멍하게 앉아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박종철은 서둘러 화장되었다.
두 시간 뒤 박종철은 한 줌 하얀 뼛가루가 되어 나왔다. 박종부가 유골을 품에 안았다. 그들을 태운 검은색 승용차가 임진강의 지류인 샛강으로 향했다. 경찰과 기자 네댓 명이 뒤따라왔다.
박정기는 한 줌 한 줌 아들을 임진강에 뿌렸다. 겨울비가 흩뿌렸다. 손을 펴자마자 바람이 아들을 낚아챘다. 아들은 하얀 가루로 흩어져 강물 위에 내려앉았다. 옆에서 박종부가 흐느꼈다. 박정기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를 따라간 동생 정옥을 생각했다. 아들 종철을 생각했다. 가슴 한편에서 내내 떠나지 않은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다.
그는 임진강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들이 죄 없이 죽은 게 힘없고 못난 아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전해야 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유골 가루가 그의 손바닥 위를 모두 떠났을 때 그는 가루를 쌌던 하얀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박정기가 허공에 외친 이 말은, 뼛가루처럼 세상 속으로 흩뿌려졌다.
박정기가 임진강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다음 날, 언론인 김중배는 신문의 칼럼(『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을 통해 호소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 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 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 주기 바란다. …… 한 젊음의 삶은 지구보다도 무겁다. ……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응시 없이 삶을 말할 수 없었다. 사건이 알려진 이후 시민들은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고문 정권에 항의했고, ‘자식 키우는 것이 두렵고 슬프다.’며 울먹였다. 박종철의 ‘죽음을 끝내 지켜 주는’ 일은 재야와 시민들의 몫이 되었다.
1987년 1월 16일 어둠이 깃든 뒤, 아들을 떠나보낸 박정기는 버스에 올랐다. 경찰에서 마련한 대형 버스였다. 버스에는 가족과 친척뿐만 아니라 경찰과 기관원도 타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기관원들은 이날부터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꼬박 15년 동안 그와 가족 주변을 감시했다.
박정기는 버스 안에서 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극한의 고통이 동반된 고문을 견디며 아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들은 목숨과 맞바꾼 걸까?
그는 아들과 함께한 시간을 헤아렸다.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3부
23년
우리 철이 어디갔나?내 새끼 내가 낳아 키웠건만,스물세 해 고이고이 키웠건만,언제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우리 철이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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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일기장(1988년 2월 15일)에
옮겨 둔 정차순의 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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