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편견. 프로이트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에 대한 도전이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이미 과거의 인간이다. 1856년에 태어나 1939년에 작고했으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던 인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령 그는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을, 또 손바닥보다 더 작은 기계를 통해 타자와 소통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보고받는 세계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정신분석의 언어가 낡고 고루한 언어라고 쉽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편견인 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새롭고 풍부해졌어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전혀 나아진 것이 없으며, 여전히 우리 시대는 프로이트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고 프로이트보다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했거나 심지어는 뒤처져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이뤄낸 정신분석학적인 혁명은 통합된 인간에 대한 오랜 믿음이 인간의 환영이며 주체로서의 인간은 분열된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밝혀주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경험적인 진실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해 인간에게 열려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개념과 기술들을 발명했다는 데 있다.
무의식. 인간에게는 각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무수한 삶의 순간들이 있다. 즐거운 순간, 슬픈 순간, 부끄러운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순간들이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그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하면서 살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통합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요컨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삶의 불운이 예감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마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인간이 ‘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위협하는 생각들, 상상들, 이미지들, 바람들을 희생한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온전한 나가 아니라 반쪽의 나이다. 그렇게 ‘나’가 되기 위한 삶의 희생을 프로이트는 억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게 희생된 정신적인 활동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의 기저에 남아, 우리의 일부분으로서 우리 삶을 결정짓는 한계들을 만들어낸다. 우리 삶은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 속에 갇힌 것처럼 동일한 유형의 실패들을 반복한다. 아무리 거듭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우리는 그에게서 옛사랑의 흔적들을 보면서 동일한 방식으로 실패하고 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만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한계 앞에서 그것이 자신의 불길한 운명이 아닌가 예감하게 되곤 한다.
프로이트는 바로 그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변화의 장치를 만들었으며, 그러한 장치를 ‘정신분석psychanalyse’이라고 불렀다. 정신분석은 우리 자신 안에 있지만 우리가 잊고 살았던 순간들을 우리 안에 재통합함으로써 온전한 ‘나’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실천적 장치이다. 내 안에 있지만 발언권을 잃은 나의 또 다른 반쪽에 그 목소리를 되돌려줌으로써 내 삶에 둘러쳐져 있는 장벽들을 철거하고 이를 통해 내 삶에 열려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되찾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목표이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발명이 인간 사유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개념들이 단순히 지식, 추상명사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로서, 개개인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분열에 대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유하고, 그러한 분열을 삶의 변화의 가능성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로 끌어올린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위대함. 프로이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가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날카롭지 못하다. 과학이 만들어내는 지식들, 인간을 하나의 대상으로 접근하면서 인간에 대해 밝혀낸 지식들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지만, 우리 자신의 주체로서의 삶이라는 수준에서 볼 때 우리의 내면을 바꾸지 못한다. 심지어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 요컨대 객관적 지식들은 프로이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어기제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의 분열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학의 발달에 의해 이뤄진 지식의 확장은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정신적인 나르시시즘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다. 예컨대, 진화심리학자가 학문의 차원에서 아무리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정작 그 개인의 삶에서까지 그 스스로를 털 없는 원숭이로 격하시키진 않을 것이다. 한 명의 개별자로서 그는 자신은 이성을 가진 존재, ‘생각하는 주체’라고 굳게 믿을 것이며, 스스로가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소위 로고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일반에 대한 지식 속에서 정작 자신의 삶은 예외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혁명에 대해 꿈꾸는 것보다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의 작은 변화에 대해 꿈꾸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적인 지식들과는 쉽게 타협할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사적인 이론들, 우리 삶의 내밀한 속살을 이루고 있는 환영들, 믿음들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이 더 많이 쌓여갈수록 오히려 그러한 포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며, 그럴수록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존재하는 바 사이의 간극은 커질 수밖에 없다. ‘나’의 환영들을 지키기 위해 나의 반쪽을 희생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과학의 발달이 정신적으로 더 많은 증상들을 발생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최초로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적인 이론들의 허상을 폭로하면서, 인간의 분열을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 안에 있는 타자, 우리 안에 있는 버려진 땅인 무의식이라는 영역에 제 목소리를 돌려주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반쪽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것이다.
혁명. 프로이트의 혁명은 단순히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알게 해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한 우리 자신의 목소리, 즉 무의식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데 있다. 요컨대 아는 것과 존재하는 바가 통합되어 우리의 소외된 삶이 근원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프로이트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 유효한,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지식의 양적인 측면에서 우리 시대는 프로이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삶이란 측면에서 결코 프로이트보다 더 진보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소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언어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정신분석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성찰해온 역사의 최정점을 경험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기회,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시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그가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땅을 개척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 누구의 삶도 아닌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내밀한 영역까지도 공개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후세로 하여금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자신의 실패까지도 그대로 남겨놓았다. 무의식의 땅을 디딘 최초의 발견자로서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어떤 도구로 그것을 발견했는지, 그런 발견을 위해 어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심지어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남겨주었던 것이다. 학자의 언어가 자신의 미숙함을 숨기고 완결된 지식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언어라면, 프로이트의 언어는 프로이트 이후의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로이트의 언어를 읽는 것은 단순히 기성품 같은 하나의 완결된 지식을 터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발견자가 했던 무의식의 발견을 다시금 반복하는 일이며, 프로이트의 독자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마치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의 무의식을 탐험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프로이트를 읽는 이유이며, 또 여전히 우리가 프로이트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이 책은 전작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과 마찬가지로 서울정신분석포럼에서 2013년 1월부터 7주간 진행되었던 정신분석 강의를 단행본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작과 달리 강의 내용과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구어체를 유지했다. 무엇보다 지식의 전수는 말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말이 주는 최대한의 장점들을 살리기로 했다. 읽는 동안 같은 지점들로 되돌아가듯이 반복되는 설명들을 만날 수 있지만, 마치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듯, 프로이트의 발견들과 정신분석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하나씩 익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목표는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기보다는 프로이트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그의 언어의 결들을 따라 프로이트를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이해하는 것과 프로이트를 읽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일 것이다. 마치 인간 일반에 대해 아는 것과 우리가 우리 삶을 읽는 것이 다른 것이듯이.
프로이트를 읽기 위해서는 서핑을 하듯이 프로이트의 언어의 결들에 올라타야 한다. 파도를 잘 타고 파도를 제 몸처럼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랜 훈련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파도를 처음 타는 입문자들에게는 낯설고 두려울 수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이 책의 언어를 익히게 된다면 그 어떤 독서를 통해서보다 프로이트의 언어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서울정신분석포럼의 회원 및 수강생들의 몫일 것이다. 3년 동안 서울정신분석포럼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그들 덕분이다. 함께 정신분석의 장場을 건설하고 있는 포럼의 동료들, 특히 한국에서 프로이트-라깡주의 정신분석이 정착할 수 있도록 힘써주시는 고신의대 박시성 선생님을 비롯해 백상현 선생님, 김서영 선생님, 김규호 선생님, 권명환 선생님, 이수련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SFP-위고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서울정신분석포럼의 목소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이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준 위고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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