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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그날 아침, 한 청년이 죽었다.
1991년 5월 8일, 새벽에 내린 비로 하늘도 공기도 맑은 봄날 아침이었다. 오전 8시에 출근한 서강대 부총장 승용차 운전기사 정삼정은 정문 경비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를 꺼내기 위해 본관 지하차고로 향했다.
신촌교차로에서 남쪽으로 1킬로쯤 떨어진 마포구 신수동 언덕에 자리 잡은 서강대는 넓지 않은 터에 건물들이 빼곡한 작은 학교였다. 본관은 정문에서 2백 미터 가량 위편의 언덕에 지어진 4층 건물로, 앞에는 넓지 않은 운동장이 있고 양쪽으로 학생회관이며 단과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아직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아 한가했다. 언덕길을 반쯤 올라가던 정삼정의 귀에 젊은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8시 5분경이었다.
“민자당을 해체하라!”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하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올려다보니 본관 4층 옥상 모서리에 한 자그마한 청년이 서있었다. 본관 옥상 중에서도 학생회관 쪽으로 한 층이 더 높아 옥탑이라 불리는 부분이었다. 2주일 전인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이래 전국의 대학가는 마지막 군사정권인 노태우 정권 반대 시위로 소요상태에 빠져있었다. 본관 바로 옆의 서강대 학생회관에도 총학생회 간부들이 매일 밤을 새우고 있었다. 시위 구경에 익숙해진 정삼정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생각했다.
‘웬 미친 녀석이 사람도 없는 시간에 저리 혼자 소리를 지르나?’
구호를 마친 청년은 난간 끝에서 잠깐 서성거리더니 손을 얼굴 앞으로 올렸다. 정삼정은 무심코, 담배를 피우려는가 보다 생각했다. 순간, 청년의 상체가 불길에 화르르 휩싸였다. 정삼정이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불길은 이내 하체로 번졌다. 거의 동시에 청년은 지상을 향해 거꾸로 떨어졌다. 불덩어리가 본관과 학생회관 사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며 소름 끼치는 퍽 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정삼정은 소리치며 달려 올라갔다. 학생회관 주변에서도 비명에 가까운 고함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분신이다!”
학생회관에서 밤샘을 하던 학생들이 달려오고, 본관 지하차고에 있는 경비실에서도 경비원들이 뛰어나왔다. 조용했던 학교는 한순간에 시끄러워졌다.
학생 중에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이는 서강대 이공대 학생회장 주철수였다. 전날 밤도 늦게까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 참석하느라 집에 가지 못하고 생물학과 학생회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어버이날이라 1층 총학생회 사무실에 내려가 아버지에게 문안 전화를 걸다가 분신이라는 외침에 놀라 달려나가 보니 사람이 불에 타고 있었다.
“불을 꺼! 불 꺼!”
쓰러진 사람은 불길에 휩싸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철수는 입고 있던 흰색 점퍼를 벗어 정신없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뒤따라 나온 경상대 학생회장 문성만도 옷을 벗어 화염을 때려 불길을 잡으려 애썼다.
“물! 물!”
차고에서 달려 나온 경비 하나가 물을 찾자 누군가 소리쳤다.
“물은 안 돼요! 소화기를 가져와요!”
정삼정은 차고로 뛰어갔으나 소화기는 비치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대신 투신자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부총장용 스텔라 승용차를 끌고 나왔다.
화염이 가시며 드러난 투신자는 불길에 오그라들어 160센치가 조금 넘는 작은 키에 마르고 왜소한 체격으로 보였다. 깊은 화상은 상체 전면과 얼굴에 집중되어있었다. 등과 엉덩이 부분은 덜 탔으나 코와 양쪽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반쯤 감긴 눈은 이미 빛을 잃었다. 출혈은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생긴 것으로 보였다.
정삼정이 승용차를 들이대자 주철수가 잔디밭에 널려있던 반정부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가져와 차 뒷좌석에 깔았다. 참혹하게 불탄 몸에 차마 직접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경상대 학생회장 문성만이 급히 학생회관으로 뛰어가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나와 투신자를 둘러씌웠다. 여럿이 들어 뒷좌석에 눕혀 싣는데 불에 타 벗겨진 살에서 흘러나온 연붉은 핏물로 몸을 감싼 이불과 현수막은 물론 좌석까지 금방 적셔졌다.
조수석에 문성만을 태운 승용차는 비상등을 켜고 교문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2킬로 거리밖에 안 되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향해 달렸다. 출근 시간의 신촌교차로는 심한 정체에 빠져있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수 없던 정삼정은 비상등을 켜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리며 중앙선을 넘어 비어있는 맞은편 차선을 질주했다. 놀란 차들이 비켜주어 교차로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승용차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8시 15분경, 추락이 있은 지 불과 10분 만이었다. 투신자는 그러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의사들은 환자의 눈에 플래시를 비춰보고 맥을 짚어 사망 진단을 내린 후 간단한 검안에 들어갔다. 사망자는 전신 80%의 3도 화상에 여러 군데 골절상을 입고 있었으며, 직접적인 사인은 머리의 내출혈로 추정되었다.
투신한 청년이 실려 가고 난 서강대 본관 옆 시멘트 도로에는 서너 군데 혈흔이 배인 위로 불에 타 벗겨진 피부 조각과 옷 조각들, 타다 남은 담뱃갑과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오백 원짜리 동전 같은 유품들이 널려있었다. 이공대 학생회장 주철수는 주위 학생들에게 현장을 보존해달라 부탁해놓고 학생회 간부인 박석일과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청년이 투신한 옥탑 부분으로 가려면 일단 철제 유리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간 다음 임시로 갖다 놓은 공사용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철제문은 경비원들이 매일 점검을 하여 잠가 놓았지만 문고리가 낡아서 힘을 주어 밀면 쉽게 열 수 있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옥탑 옥상에 플래카드를 내려 걸기 위해 경비실의 허가를 받지 않고 수시로 올라가곤 해서 철제문에 익숙했다. 주철수와 박석일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마주 내려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철제문은 흔들 필요도 없이 열려있었다.
아직 서늘한 아침이었다. 주철수는 불길을 잡느라 그을음이 묻은 흰색 자바를 다시 걸쳐 입고 알루미늄 사다리를 밟아 옥탑 옥상에 올라갔다. 옥탑 옥상은 가로 세로 20미터 정도의 넓이로, 40센티미터 높이의 시멘트 턱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닥에는 조약돌이 깔려있었다. 전날 내린 비로 드문드문 빗물이 고여있었으나 자갈밭이라 족적은 남아있지 았았다. 두 사람은 꼼꼼히 현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청년이 몸에 불을 붙인 학생회관 쪽 모서리 주변에는 청색 양복 윗도리 한 벌과 한 되들이 작은 플라스틱 신나통 2개, 신나통을 쌌던 5월 8일 자 한겨레신문 한 부가 놓여있었다. 신나통은 신문에 한번 싼 뒤 다시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는데 한 통은 분신에 사용한 듯 비어있었으나 다른 한 통은 비닐도 개봉되지 않은 상태였다. 모서리 난간에서 내려다보니 아래층 베란다 형태로 돌출된 부분에 투신자가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떨어져있었다.
뒤따라 경비원들과 학생 여럿이 올라왔다. 증인 확보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주철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닥에 놓인 청색 양복을 펼쳐보았다. ‘미조사’라는 양복점 상호 아래 김기설이라는 이름이 박음질되어 있었고 주머니에는 흰 종이 두 장이 접혀져 들어있었다. 힘차고 빠른 달필로 쓰인 두 장의 유서로 하나는 짧고 하나는 좀 더 길었다.
짧은 유서는 부모에게 남기는 글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버이날입니다. 오늘 이 행위를 일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지껏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라는 것을 해오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제 기설이가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닌 조국의 아들이 됨을 선포하면서 마지막 효도를 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는 대책위 사무실에 위임하세요. 전민련 선택이 형, 서준식 인권위원장님께 위임하세요. 제 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님들입니다. - 기설.”
조금 긴 유서는 31년째 군사독재 치하에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해 남기는 글이었다.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할까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 노태우 정권은 퇴진해야 합니다. 민자당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만을 안겨주는 지금의 정권은 꼭 타도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과 아픔을 안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죄악스러운 행위만을 일삼아 온 노태우 정권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민중권력 쟁취를 위한 행진을 위해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 김기설.”
주철수는 김기설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으나 부모에게 남기는 유서에 나온 ‘선택이 형’이라는 인물이 서강대 학생운동의 선배이자 전국적 민주화운동단체인 전민련에서 일하는 김선택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김기설도 서강대 학생이라 추측했다. 그는 박석일에게 김기설이 어느 과 학생인지 알아보라 하고는 유서를 원래 있던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경비 두 명과 다른 학생에게 현장을 보존해달라고 부탁한 후 등교투쟁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왔다.
서강대 학생회 간부들은 강경대 치사사건 이후 아침마다 교문에 늘어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시위를 선동하는 등교투쟁을 하고 있었다. 분신 현장과 유서를 본 직후여서 감정이 격해진 주철수는 이날 등교투쟁 내내 눈물을 쏟으며 정권타도를 울부짖었다. 나란히 선 다른 간부들도 목이 메어 제대로 구호를 외치지 못했고, 지나가던 여학생들도 서강대생이 분신했다는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았다.
서강대 총학생회장인 표홍철이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간 것은 주철수 일행이 내려와 등교투쟁을 준비하던 8시 반경이었다. 옥상에는 주철수의 부탁대로 경비 두 명과 학생 하나가 유류품을 지키고 있었다. 서강대 총장인 가톨릭 사제 박홍이 비서와 함께 올라온 것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표홍철은 서강대 학생운동의 대표로서, 모든 것을 강경대 치사사건 대책위원회에 맡기라는 유서 내용에 따라 김기설의 유류품을 수거해 총학생회실에 보관하도록 했다. 뒤따라 올라온 박홍 총장도 이에 응해 유서를 읽어보기만 한 후 표홍철에게 돌려주었다. 표홍철은 유서만은 대량 복사를 위해 자신의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박홍은 다른 사람들이 현장을 훼손하지 않도록 경비원을 세워두고 옥상 문을 잠그도록 조치했다.
모든 것은 빠르게 돌아갔다. 연세대 대책회의에 나와있다가 소식을 들은 방송과 신문기자들이 서강대로 몰려와 긴급취재를 했다. 기자들이 대여섯 명씩 두세 차례 옥상에 올라가 취재하면서 김기설의 분신은 한 시간도 안 된 아홉시 뉴스에 나가기 시작했다.
표홍철은 경찰이 현장검증을 도와달라고 하자 유류품들을 옥상에 가지고 올라가 사진을 찍게 한 후 연세대 학생회관에 설치되어 있던 강경대 치사사건 대책회의에 넘겼다. 자신이 확보하고 있던 유서는 여러 장을 복사해 돌리고 원본은 가지고 있었는데, 검사들이 찾아와 달라고 했으나 고인의 뜻대로 해야 한다며 복사본만을 주고 원본은 자신이 보관했다. 검사들도 순순히 물러났다.
김기설의 시신이 안치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는 소식을 들은 재야 인사들과 타 대학 학생들, 가족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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