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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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가 넘는 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도 함께 찾아와 가죽옷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선생이 계신 안의현의 상황을 잘 모르니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가뭄의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는데, 번잡한 정사에 배고픈 백성들마저 구제해야 하는 상황일 테니 몹시 괴로우시리라 그저 짐작만 해 봅니다. 어지러운 세상과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도 저는 예전과 다름없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문체와 관련된 소식은 이미 접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명·청의 문체를 배웠다는 이유로 임금님의 꾸지람을 들었고,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해 내각에서 북청부사로 부임하는 성대중의 송별연을 치렀습니다. 그는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임금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승지인 이서구와 이덕무, 유득공 등 여러 검서가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규장각이 존재하는 한 대대로 전해질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어제 경연에서 천신賤臣에게 하교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요즈음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지원이라는 자의 죄이니 가히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문란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로 하여금 결자해지 또한 하게 해야 한다. 그에게 편지를 써라.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서둘러 써서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일러라. 제대로 된 글이라면 제학提學의 자리를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중죄를 내릴 것이라는 뜻도 분명히 밝혀라.”
이런 임금님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으시리라 짐작합니다.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이 말처럼 쉽게 지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임금님의 고심과 지덕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것이 선생의 상황일진대 어려움을 핑계로 잠시라도 늦추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겠지요.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명·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글이나 영남 산수기 같은 것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보내시는 것이지요. 어찌 되었건 두어 달 안에는 올려 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편지를 드린 이유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한 시절의 벗 남공철이 보낸 편지는 눈과 함께 왔다. 어젯밤까지도 마른하늘이던 까닭에 조금은 의아했다. 편지를 열어 보고서야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젊은 벗은 서울에 내린 폭설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남자는 그 문장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었다.
“한 자가 넘는 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도 함께 찾아와 가죽옷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선생이 계신 안의현의 상황을 잘 모르니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처음에는 한 자 넘게 내린 눈이, 그다음으로는 두툼하고 따뜻한 가죽옷이, 마지막으로는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이 차례로 다가와 가슴을 두드렸다. 남자는 편지를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미묘한 통증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가쁜 숨이 평탄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통증도 오랜 시간을 허비해 가며 조금씩 조금씩 소멸되어 갔다. 남자는 편지가 놓인 서안을 잠시 바라보다 지난밤에 마시다 남은 술로 눈길을 돌렸다.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고는 단번에 들이켰다. 불쾌한 맛이었다. 그래도 마시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미지근하면서도 걸쭉한 술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목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통증을 단번에 밀어냈으므로.
남자는 입술을 감쳐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반쯤 열었다. 내리다 중간에 멈춰서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눈은 천천히 내렸다. 군소리를 덧붙이기는 했어도 서설은 서설이었다. 가을부터 잔뜩 목말라 있던 땅은 모처럼 내리는 반가운 눈을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남자는 서안 앞으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손에 들었다.
여유롭게 내리는 눈을 본 때문인지 이제 남자는 더 이상 불안과 초조를 느끼지 않았다. 두툼한 눈썹을 자기도 모르게 살짝 들어 올리고 읽기에 몰두한 모습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가끔씩 허허,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벗이 구사한 따뜻한 단어들 때문일까? 그런 이유도 백에 한둘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벗의 편지가 서울에서부터 힘들게 끌고 온 반가운 눈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 편지를 읽던 남자가 “벗이 몰고 온 눈이라, 꽤 아름다운 인연이로군” 하고 약간은 감상적인 말을 느닷없이 중얼거린 것을 보면.
남자는 자신이 뱉은 낯간지러운 말이 조금은 민망하게 여겨졌는지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고개를 돌려 내리는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느리게 내렸다. 남자는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물론 남자는 편지와 눈, 인간과 자연을 그렇듯 자의적으로 연결시키는 게 충분한 근거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자연현상에 대한 남자의 지식은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남자는 지구가 둥글고 허공에 걸려 있어 사방이 모나지도 않고 위아래도 없다는 것, 그 지구가 문의 돌쩌귀가 돌아가듯 해서 태양과 처음 마주치는 곳이 아침이 된다는 것, 별은 달보다 크고 태양은 지구보다 크지만 달이 커 보이고 별이 작아 보이는 까닭은 거리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 흔히 말하는 오행은 실제의 자연현상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 요약해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프다며 절로 고개를 젓는 그 진술들이 거짓 한 점 없는 진실 그 자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왜 편지와 눈을 그렇듯 막무가내로 연결 지었을까? 그건 바로 그 곱고 따뜻한 단어와 문장 뒤에 이어질 내용을 읽기도 전에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벗이 쓴 비수 같은 글들이 이내 장막을 제치고 본색을 드러내어 남자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놓을 것을 분명히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앞으로 읽어 나갈 그 고통의 글들이 차마 벗의 진심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 믿음을 위해 느릿느릿 들판을 덮어 가는 눈과 벗의 편지를 억지로 연결 지었던 것이다.
요즈음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지원이라는 자의 죄이니 가히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문란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로 하여금 결자해지 또한 하게 해야 한다. 그에게 편지를 써라.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서둘러 써서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일러라. 제대로 된 글이라면 제학의 자리를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중죄를 내릴 것이라는 뜻도 분명히 밝혀라.
마음을 다잡은 효과는 컸다. 죄,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 세상에 유행한 문체, 결자해지 같은 단호하고 차가운 표현들은 생각만큼 깊게 남자의 마음을 후벼 파지 못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상처딱지를 무심코 긁었다가 갑작스럽게 피를 본 정도의 뜨끔하고 찌릿한 아픔 정도랄까?
남자는 임금의 명을 담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은 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순간 머릿속 피가 죄다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지럼증이 재빨리 다가와 주먹으로 남자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순간적인 충격에 머리를 주무른 후 술병을 기울였지만 나오는 건 몇 방울의 술뿐이었다.
남자는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받았으니 답장을 쓰는 게 예의일 것이다. 벗이 쓰라는 글, 그러니까 임금이 받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바른 글도 선물처럼 덧붙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피가 채워지지 않은 남자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붓만 들면 문장이 절로 흘러나와 홀린 듯 종이를 적시곤 하던 남자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물론 드문 일이기는 하나 한 번도 없던 일은 아니었다. 글 쓰는 이들 대개가 그렇겠지만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남자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역시 하나밖에는 없었다. 글이 스스로 굴을 파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기는 하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마음이 담기지도 않은 글을 글이라고 써서 보낼 수는 없었다. 자존심 대신 글을 이마에 붙이고 산 게 남자의 인생이었으므로. 하여 남자는 벗의 요구와는 달리, 잠시 늦추는 길, 그 용납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죄, 죗값, 허물, 속죄 등의 단어가 그럴 수는 없다며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것을 남자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단번에 눌러 버렸다.
좋은 날이었다. 소리도 없는 눈이 한없이 느리게 내리는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귓속의 이명처럼 커다랗게 울리는 날이었다. 남자는 아예 눈을 감았다. 비로소 눈이 내리는 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머나먼 우주에서의 짧은 공명과도 같은 그 현묘한 소리를 도대체 문장으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사마천이었다면? 두보였다면? 이백이었다면? 왕세정, 혹은 원굉도, 혹은 김성탄, 혹은 이덕무였다면? 굵은 목소리 하나가 제 존재를 숨기지도 않고 들판 저쪽에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고민한 내용이었다. 실상은 별로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 굵은 목소리가 눈발을 헤치고 남자 곁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털고 자리에 앉은 목소리는 남자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내 이야기 하나 들어 보겠나?”
남자는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이야기라면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 우울증에 시달리던 남자를 지옥의 문턱에서 구제한 것도, 외로운 이국에서의 밤을 견디게 한 것도 결국은 이야기였으니. 더군다나 남자는 굵은 목소리가 들려줄 이야기가 비록 우주의 공명에는 못 미쳐도 나름 꽤 흥미롭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굵은 목소리는 바로 남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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