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의과 대학에 다니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지만, 죽음을 다룬 적은 거의 없었다. 첫 학기에 바짝 마른 해부용 사체를 접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인체 해부학을 배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전공 교재는 나이 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이 알고 있던 의대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꺼져 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죽음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톨스토이의 고전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Ilyich』을 한 시간 다뤘을 때였다. 학생들을 더 원만하고 인간적인 의사로 키워 내기 위해 매주 연 ‘환자-의사Patient-Doctor’라는 세미나중 한 과정이었다. 우리는 세미나를 하면서 신체검사를 할 때 지켜야 할 예절을 배울 때도 있었고, 사회경제적 요인과 인종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배울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우리는 세미나실에 모여서 이름도 모르는 불치병에 걸려 점점 병세가 악화돼 가는 이반 일리치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 마흔다섯 살인 이반 일리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간급 치안 판사로, 항상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잘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사다리에서 떨어진 뒤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다.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전에는‘지적이고 세련되고 활기차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일리치가 점점 우울해지고 쇠약해지자 친구와 동료들은 그를 피한다. 그의 아내는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의사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아무도 다른 의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내린 처방은 하나같이 소용이 없다. 자신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 일리치는 화를 내기만 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그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때로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수척해지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극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채 산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계속해서 말한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난 후에 그가 가장 원했던 건 (그 사실을 고백하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 데다 턱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나이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의대 학생들의 생각은 이랬다. 이반 일리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적절히 위로하지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인정하지도 못한 것은 모두 당시 문화와 개별 인물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톨스토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러시아는 우리에게 가혹하고 거의 원시적으로까지 보였다. 우리는 현대 의학 지식이 있었다면 그게 무슨 병이었든 간에 일리치를 고칠 수 있었을 거라 확고히 믿었고, 또한 정직과 친절이 현대 의사의 기본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환자의 마음을 잘 어루만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지식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공감하고 동정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출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의대 학비를 내는 것은 인체가 돌아가는 과정과 병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병을 멈추기 위해 지금까지 축적해 온 방대한 기술과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는 별로 달리 생각할 만한 게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에 대해서는 금세 잊고 말았다.
그러나 몇 년 후 외과 전공의 훈련을 거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한 나는 점점 쇠락해 가다가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내게 그들을 도울 준비가 얼마나 안 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외과 전공의 과정 1년 차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첫 에세이에는 조지프 라자로프라고 이름 붙인 환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시 행정담당관인 그는 몇 년 전 폐암으로 아내를 여의었는데, 60대에 접어든 후 그도 불치암에 걸렸다. 전립선암이 몸 전체에 전이된 것이다. 체중이 20킬로그램 이상 줄었고, 복부, 음낭, 다리에 물이 차올랐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오른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배변 조절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신경외과 병동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병원에 입원했다. 암이 흉추까지 번져서 척수를 누르고 있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암 자체는 고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료진은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상 방사선 치료에도 암세포는 줄어들지 않았다. 신경외과 주치의는 그에게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하나는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완화치료, 다른 하나는 척추에서 점점 자라나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라자로프는 수술을 선택했다. 당시 신경외과 인턴이었던 나의 임무는 그가 수술에 따르는 위험을 이해하고 있으며, 수술하기를 원한다는 확인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라자로프의 입원실 밖에 서서 땀으로 축축해진 손으로 그의 차트를 쥔 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궁리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척수 손상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암을 완치하거나 마비를 되돌릴 수도,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잘해야 몇 달 이상 살지 못할 것이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른다. 가슴을 절개하고 갈비뼈를 하나 들어낸 다음 폐의 바람을 빼서 납작하게 만들어야 비로소 척추에 접근할 수 있다. 출혈이 많은 수술이고 회복은 더딜 것이다. 그는 이미 쇠약해진 상태에서 몸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수술 후 합병증의 위험에까지 직면해 있었다. 수술로 삶의 질이 나빠지고 수명이 단축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신경외과 주치의가 이 모든 가능성을 라자로프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그는 자신이 수술을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나는 그냥 환자를 만나 서류를 작성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라자로프의 얼굴은 잿빛에다 굉장히 수척해 보였다. 나는 인턴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후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수술에 따르는 위험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마비, 뇌졸중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수 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되 너무 가혹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 말이 그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실에 함께 있던 그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는 게 과연 좋은 생각인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라자로프는 마뜩잖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날 포기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라자로프에게서 서명을 받은 후 병실 밖으로 나오자 그의 아들이 따라 나오며 나를 잡았다. 어머니가 중환자실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임종했을 때 아버지 자신은 저렇게 죽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고 저렇게 고집을 피운다는 얘기였다.
당시 나는 라자로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술에 따르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도 그가 원하는 삶을 되찾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변 능력, 활력 등 병이 악화되기 전에 누렸던 생활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길고도 끔찍한 죽음을 경험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추구한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수술은 기술적으로는 성공이었다. 8시간 반에 걸친 수술로 그의 척추에 침범한 종양을 제거하고 척추체를 아크릴 시멘트로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척수를 짓누르던 압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환자는 수술의 부담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그는 호흡부전이 생겼고, 전신감염에 걸렸으며, 움직이지 못해서 피떡이 고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혈액 희석제 때문에 출혈을 일으켰다. 우리는 날마다 뒤처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14일째 되는 날, 그의 아들은 의료진에게 이 모든 것을 그만 멈춰 달라고 말했다.
라자로프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인공호흡기를 끄는 임무가 내게 떨어졌다. 나는 그에게 투여되고 있는 모르핀 주사 용량이 충분히 높은지 확인했다. 호흡곤란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그가 내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숙여 호흡기를 입에서 빼내겠다고 속삭였다. 호흡기를 빼내자 그는 몇 번 기침을 하고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의 호흡이 점점 힘겨워지더니 이내 멈췄다. 나는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점점 꺼져 가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내가 처음 라자로프에 관한 글을 쓴 지도 이제 10년이 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시 그의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 앞에 놓여 있던 선택지에 대해 정직하게 이야기하기를 얼마나 꺼려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다양한 치료 방법이 갖는 특정 위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병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암 주치의, 방사선 치료사, 외과 집도의 등 절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달에 걸쳐 그의 치료를 도왔던 의료진 모두가 그 문제를 논하려 하지 않았다. 환자의 상태를 둘러싼 큰 그림이나 의료진의 궁극적인 한계에 대해서 논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그가 가장 중요한 것을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은 물론이다. 라자로프가 환상을 좇고 있었다면, 의료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기 병원에 있었고, 몸 전체로 점점 퍼져 가는 암 때문에 부분적인 마비를 겪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단 몇 주 전에 누리던 삶으로도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환자가 그 현실에 대처하도록 돕는 일은 우리 능력 밖의 일로 느껴졌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도, 환자를 위로하지도, 적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환자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치료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어쩌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반 일리치가 만났던 19세기의 원시적인 의사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다. 아니 실은 더 나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환자에게 새로운 형태의 육체적 고문을 가한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누가 더 원시적인 의사인지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일 아닌가. 현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의학계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이 문제를 다룰 준비가 놀라울 정도로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현실이 대체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이 비율은 17%로 줄었다. 이 시기에 어떻든지 집에서 죽은 사람들은 병원에 가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게 일을 당했을 공산이 크다. 말하자면 중증 심장마비, 뇌졸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거나 너무 고립되어 있어서 도움을 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얘기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진국에서도 노화와 죽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겪는 일이 됐다.
의사가 되면서 나는 치료를 받는 입장에서 치료를 하는 입장이 됐다. 두 분 다 의사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음에도 병원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나는 이전까지 누군가 죽는 것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언젠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이 생각나서가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내 또래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의사 가운을, 그들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서로 입장이 바뀌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 가족이 환자가 되는 상황은 상상할 수 있었다. 내 가족들—아내, 부모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을 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의학 기술 덕분에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의학 기술로도 목숨을 구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봤을 때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내 환자가 죽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뭔가 반칙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게임의 규칙을 저쪽에서 어긴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게 어떤 게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게임에서 우리는 항상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새로 일을 시작한 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환자가 죽어 가는 모습이나 죽음 그 자체를 맞닥뜨려야 한다. 처음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도 있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처음 환자들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나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내 침대에서 죽은 환자의 시체를 발견하는 악몽이 되풀이됐다.
나는 꿈속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 ‘도대체 이 사람이 여기 어떻게 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꿈속이지만 나는 발각 당하지 않고 시체를 병원에 되돌려 놓지 않으면 엄청난 곤경에 빠질 것이고 심지어 체포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시체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을까 생각해 보지만 너무 무거울 것 같다. 트렁크에 넣는 데 성공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피가 기름 얼룩처럼 스며 나오다가 결국 넘쳐흐른다. 병원까지 가지고 가서 환자 이송용 침대에 싣고 복도를 헤매지만 그 환자가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 누군가가 “이봐!”하며 나를 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심장이 요동치며 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면 어둠 속에서 아내 옆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는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느꼈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는 돌아가신 외과의 셔윈 눌랜드Sherwin Nuland 박사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How We Die』에서 이렇게 한탄한다.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를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그러나 나는 기술이라는 놀라운 무기가 배치된 곳에서 훈련을 받는 21세기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덜 오만하게 굴었다’는 것이 정말로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보통 의사가 되는 사람들은 일에서 얻는 만족감을 상상하며 이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 만족감이라는 것이 능숙함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것은 목수가 다 부서져 가는 골동품 서랍을 감쪽같이 고치는 데 성공하고 얻는 깊은 만족감, 아이들이 어느 순간 원자라는 개념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과학 선생님이 얻는 만족감과 다르지 않다. 만족감은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데서 오기도 하지만, 어렵고 난해한 문제를 기술적으로 능숙하게 해결했다는 데서 오기도 한다. 능숙함은 한 사람의 확고한 정체성과 연결되는 문제다. 따라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날 때만큼 정체성에 위협을 받는 때는 없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를 먹는다는 삶의 비극을 피할 길이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제는 죽은 환자들, 죽어 가는 환자들이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고칠 수 없는 환자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때문에 존재하고 성공한 분야다. 해결 가능한 문제라면 우리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이 질문에 대해 적절히 답하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또한 그것이 냉담함과 몰인정함, 그리고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죽음을 일종의 의학적 경험으로 만드는 실험이 시작된 것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역사가 짧은 셈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게 어떤 건지, 의학이 이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키지 못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유한성에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외과의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중년이 된 나는 이제 나 자신도 내 환자들도 현재의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어떤 답이 나와야 할지, 심지어 적절한 답을 내놓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둘러싼 베일을 벗기고 더 가까이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가장 혼란스러운 게 무언지, 가장 이상한 게 무언지, 혹은 가장 불안한 게 무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자이자 과학자로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노인들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는지 알 수 있다.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늙어 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환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아졌고, 환자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안식을 거부당해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져 왔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죽음, 좀 더 정확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 의사가 생의 종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조망하는 책을 썼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거론한다 해도 어떤 이들은 늙고 병든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는 고려장식 공동체의 망령을 불러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혹하고 가차없는 삶의 사이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습성 때문에 늙고 병든 구성원들이 이미 희생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더 나은 해결책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 우리가 제대로 눈을 뜨고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떨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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