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책>이다. ‘작은 책’이라고 띄어쓰면 안 된다. ‘작은책’은 고유명사가 됐다. 내가 태어난 해는 1995년이다. 내가 태어난 사연은 이렇다.
보리출판사 대표였던 윤구병 할아버지는 평소에 노보에 관심이 많았다. 대우조선 노보 <새벽을 여는 함성>을 읽으면서 집행부가 바뀌면 노보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보를 보면 조합원을 주인으로 여기는지 손님으로 여기는지,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했다. 윤구병 할아버지는 노보에 실린 일반 조합원들의 생활글을 보면서,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글쟁이들보다 우리 노동자들의 글이 훨씬 더 감동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하는 삶에서 우러난 느낌과 생각이야말로 우리 노동자들이 읽어야 할 글이었다.
그 당시 보리출판사에서 영업을 맡고 있었던 정낙묵 씨가 영업을 하러 전국에 있는 서점을 다니면서 짬을 내 노동조합 회보(노보)를 모아 왔다. 윤구병 할아버지가 노보를 책상 위에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글들을 추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추린 글을 다시 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인 이성인 선생님이 추렸다. 추린 글을 ‘노동자 글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월간 <길>지에 실었다. 머리글은 당시 10여 년 동안 글쓰기교육연구회를 이끌었던 고 이오덕 선생님이 써 주셨다. 이오덕 선생님은 머리글에서 노동자 글쓰기 운동이 널리 퍼져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삶을 더욱더 풍부하게 가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길>지에 실었던 노동자 글모음은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볼 수 있도록 <길>지에 실린 글들을 다시 추려서 <작은책·노동자 글모음> 이름으로 엮었다. 첫 호는 1993년 5월 25일, <함께 산다는 것은>이었다. 그해 10월에 2집 <우리 하나 되는 날>, 다음해 1994년 5월에 3집 <박힌 돌이 되기까지>가 나왔다. 요놈들이 내 숨겨진 동생들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쓴 글을 보고 “아, 이건 내 이야기네” 하고 무릎을 치면서 공감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윤구병 할아버지는 노동자들이 볼 수 있는 월간지를 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995년 3월에 <작은책> ‘창간 준비호’를 냈다. 맨 처음 나를 엮은이는 차광주 씨다. 그이는 창간 준비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한테는 오래전부터 꿈이 있었어요. 노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세상의 모습도 배우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배우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터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배우고 싶은 거였죠.”
그동안 글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글쟁이들이 꾸며 낸 이야기들뿐이었다. <작은책> 창간 준비호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쓴 글들을 실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 이승숙 씨의 ‘육아일기’, 옥림아파트 주부 최양희 씨의 ‘첫발을 내딛는 쓰레기 종량제’, 원진레이온 노동자 윤광 씨의 ‘늙은 노동자의 독백’ 등의 글이 있었다. 한 편 한 편 기막힌 사연들이었다.
“나는 벌금이 무서워 한 장에 140원 하는 10리터짜리 비닐봉지에 이삼 일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터질듯 채워서 버린다. 음식 냄새와 이름 모를 날파리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첫발을 내딛는 쓰레기 종량제’ 가운데에서
오징어 발에한 잔 깡소주눈물 섞어 마시며역겨워울부짖는 사투리─ ‘늙은 노동자의 독백’ 가운데에서
그리고 드디어 1995년 5월 1일 노동절에 나 <작은책>이 태어났다. 내 몸값은 1년에 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도 보라고 싸게 내놓았다. 비록 64쪽밖에 되지 않고 겉표지는 후줄그레하고 내 몸 가운데를 호치키스로 박은 허접한 책이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책이었다. 겉표지에는 ‘원, 세상에 이런 일이’ 꼭지에 ‘내가 겪은 80년 5월의 광주’, 산업 재해 - ‘편해서 생기는 엄살병이라고요?’, 그리고 ‘노동자 글쓰기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이 있었다. 이 ‘노동자 글쓰기 어떻게 할까?’는 1995년 12월까지 연재를 한다. 이 꼭지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도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태어났지만 나는 창고에 처박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책’이다. 책은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윤구병 할아버지를 비롯해 <작은책> 처음 대표였던 차광주 씨, 그리고 영업을 맡았던 정낙묵 씨는 나를 가방에 잔뜩 갖고 다니면서 책을 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나를 본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책이 있냐”며 반가워했다. 노동절 행사 때 가판을 펴 놓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작은책 일꾼들을 아는 척해 주고 동료들에게 정기구독을 권유했다. 집회 때 행진을 하면 나를 만드는 <작은책> 일꾼들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노동자들을 반겨 주기도 했다.
하지만 책값이 싸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보는 책이라 살림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2002년 초부터 조금씩 어려워져 결국 6, 7월 나는 두 달 나오지 못했다. 윤구병 할아버지가 나서서 ‘혁신호’라는 이름으로 8월호부터 다시 냈다.
그리고 3년 뒤 2005년 5월부터 다시 또 위기가 찾아왔다. 책을 더 낼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윤구병 할아버지는 그때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안건모 씨를 불러 나를 맡겼다. 그 뒤로 10년이 지난 2015년, 올해로 나는 스무 살 청년이 됐다. 사람 나이로 치자면 아직도 철이 없는 젊은이지만 잡지로 스무 살이면 세상을 꿰뚫는 혜안이 생길 만한 나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나한테 글을 연재해서 전태일 문학상을 탄 사람도 세 사람이나 된다.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는 이근제 씨, 버스 기사였던 안건모와 박광현 씨이다. 셋 다 글이라는 걸 써 보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나를 알게 되면서 전태일 문학상까지 타게 됐다.
이근제 씨는 글을 쓰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넓어졌다.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고발하면서 글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10년 동안 작은책 글쓰기 모임 회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또 퍼뜨렸다. 안건모는 여기선 생략한다.
나에게 글을 연재하기 시작해서 책을 낸 사람들도 많다. 신한일전기 노동자 장형일 씨도 나한테 글을 연재하다가 <한겨레> 신문과 월간 <노동세상>에 칼럼을 썼다. 그 글들을 모아 출판사에서 《일하는 형일 씨의 꽃 같은 당신》을 냈다. 안미선 씨는 나한테 실었던 글을 모아 ‘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라는 책을 냈다. 안미선 씨는 그 뒤 《여성, 목소리들》과 다른 이들과 함께 쓴 책 《엄마의 탄생》도 냈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충남 당진에서 미당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윤혜신 씨는 나한테 글을 연재하면서 식당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글을 모아 ‘동녘출판사’에서 《착한 밥상 이야기》를 냈고, 보리출판사에서 전통 살림살이를 세밀화로 소개한 도감 《살림살이》를 냈다. 그 밖에도 《착한요리 상식사전》, 《사계절 갈라 메뉴 303》 등 몇 권을 냈고, 요즘 EBS <최고의 요리비결>의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윤혜신 씨는 나를 가리켜 글쓰기의 친정집이라고 한다.
꼭 그렇게 글 써서 책을 낸 사람들만 삶이 풍요로워진 게 아니다. 책을 내지 않았더라도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회원들과 삶의 지혜를 나누는 이들은 많다. 전국의 글쓰기 모임 회원들은 글을 나누면서 자기 고민을 토로하고 아팠던 상처를 치유하고 즐거운 삶을 누린다.
그러면 그동안 나는 노동자들의 삶을 실제로 나아지게 하는 데 얼마만큼 기여를 했을까. 워낙 자본이 발악을 하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해 노동자들이 살기는 옛날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의 본질을 깨닫고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나를 가까이 한 이들은 이제 자본주의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요즘은 아이들도 이 천민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정부를 믿지 않는다.
물론 아직 세상을 모르는 이도 많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악플을 다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같은 자들도 생겨났다. 기생충학과 교수 서민은 그 까닭이 ‘책을 안 읽는 세대의 무식함’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책을 안 읽는 까닭은 스마트폰 때문이다. 서민 씨는 일베가 정식으로 출범한 때가 스마트폰 출시 이후 2010년이라고 하면서 스마트폰은 책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조차 앗아가 버린 무서운 기계라고 진단한다.
나는 그런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책이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이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이들의 삶을 실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 주는 거울. 나는 <작은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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