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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는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새천년의 도래와 더불어 과학, 경제 발전, 군사 개입,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의 권력은 점점 더 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파국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20세기를 몇 달 남겨 놓고, 밀레니엄 버그의 위험을 알리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은 이미 이런 불안을 경험했다. 컴퓨터 시스템이 다운될지 모르니 스스로 대비하라는 충고를 하며 정치인들이 법석을 떠는 동안,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파국에 대한 두려움은 이내 그런 음모를 꾸민 자들을 색출하는 일로 바뀌었다. 밀레니엄 버그라는 건 없었음이 밝혀지자 이 공연한 소동이 죄다 컴퓨터 회사들이 최신 사양 컴퓨터를 더 팔아먹으려고 꾸며낸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불안의 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 세기 몇 가지 중대한 사회 위기들이 나타난 후에 불안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 불안의 시대가 왔다. 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살상 무기들이 사용됨에 따라 현대문명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된 것이다. 폴 발레리는 “정신의 위기”에서 당대를, 판이한 관념들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고 인생과 학문의 확고한 준거가 송두리째 사라진 시대로 묘사했다. 즉, 전쟁 위기가 끝났음에도 경제 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의 위기”가 여전했고, 이 모든 것들이 불안을 조장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특히 실존에 번민했는데, 어떤 이들은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이들은 현대 모든 우상들의 죽음이 압도적인 불안감의 주원인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서 무척이나 고독해 보였다. 하지만 과학, 진보, 이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도 똑같이 중요했다. 이는 유럽의 죽음으로도 보였다. 불안의 시대는 새로운 독재자들이 활동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히틀러 집권은 불안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는 두 번째 불안의 시대가 출현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불안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고, 특히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의 경험은 불안의 시대를 재촉했다. 또다시 대량 살상 무기가 극도로 잔혹한 폭력을 낳았고 이로 인해 전후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됐다. 또한 경제 위기는 미래상을 찾으려 애쓰는 인간의 위기와 결부되었다. 하지만 이런 불안에 대한 이야기는 “풍요의 시대”를 연 1960년대와 더불어 잦아들었다.
최근에 나타난 불안의 시대는, 1990년대 우리가 가장 잔혹한 형태의 폭력을 목격했고 지난 몇 년 동안에는 새로운 전쟁들과 21세기의 악들 ─ 테러 공격과 치명적인 바이러스 사용 위협 ─ 을 상대해 오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한다. 이런 위험들이 특히 공포스러운 것은 그것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계속 증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즉각 근절해 버릴 수 있는 의학적 또는 군사적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빈 라덴을 최고의 악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당시 뉴욕 거리의 한 중국인 노점상은 빈 라덴의 기이한 특성을 잘 포착해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옛날 서부영화에 나오는 현상 수배 포스터를 모방해 “빈 라덴: 죽은 혹은 살아 있는”dead or alive 로고를 박은 티셔츠들 한가운데 “빈 라덴: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dead and alive이라고 적은 티셔츠를 진열해 둔 것이다.
비록 새로운 불안의 시대가 주로 테러 공격과 새로운 질병의 위험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더라도 불안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주체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자기 인식이 달라질 때 생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몇 년간 미디어에는 새로운 심리 장애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증후군들 가운데 일부는 꽤나 기이하다. 예컨대 1990년대에 미국의 신흥 부자들은 ‘부자병’[어플루엔자]affluenza으로도 불리는 소위 ‘졸부 증후군’을 겪었다고 한다.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어린애의 경우 ‘모험심 결핍 장애’가 생길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또 여성지들은 자기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신체 이형 장애’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더욱이 이런 장애 목록은 빠르게 증가하는 듯하다. 오늘날 주체는 스스로를 완벽히 통제해야 하고 늘 생산적이어야 하며, 사회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주체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장애로 분류된다. 동시에 주체가 사회적 기대와 관련해 겪는 내면의 동요와 딜레마는 신속히 불안으로 명명된다. 심지어 9·11 이전에도 불안이라는 단어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는 뉴욕 패션 위크에서 패션 잡지 편집자들이 “구두 불안”shoe anxiety을 느꼈다고 보도했다(『뉴욕타임스』 2000/09/26). 기사에는 편집자들이 느낀 불안이 패션쇼 무대에서 본 구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형편없는 구두를 신어서인지, 아니면 자기 집 신발장의 방대한 구두 컬렉션에서 도무지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는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롤로 메이Rollo May는 20세기의 불안을 연구한 책에서 1945년 전에는 불안이 “은밀한” 형태로 존재했으나 이후에는 “공공연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불안에 대한 대중의 두 가지 태도는 유사한 방향을 가리켰다. 즉, 두 태도 모두에서 핵심은 주체의 고독,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무능력, [집단이 기대하는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동조conformity의 압력, 그리고 개인이 저마다 느끼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메이는 “은밀한 불안”의 징후는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you can’t go home again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고향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주체가 심리적 자율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과 관련된다. 일터에서나 여가 시간에나 모두 과하게 일하고 활동함으로써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는 주체의 필사적인 시도들도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1920년대 말에 출현한 불안은 물론 경제 불황[대공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불안정은 사람들이 사생활에서 갖게 된 불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사회학자 린드 부부Lynds는 소위 미들타운Middletown 생활에 관한 유명한 연구에서 1920년대 말에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특히 심각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경제 공황 이후] 일에 대한 강박적 욕구가 있었고,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는 동조에 대한 압력이 만연해 있었으며, 끊임없이 뭔가를 해서 자신들의 여가 시간조차 쉬지 않고 다양한 활동으로 채워 나가려는 광적인 열기가 존재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문화적 규범조차 상충하는 혼돈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린드 부부에 따르면 삶의 전 영역에서 발생한 변화와 불확실성이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엄격하고 보수적인 경제 및 사회 이데올로기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불안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온갖 새로운(예컨대 핵전쟁과 관련한) 파국들에 대한 두려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도 훨씬 더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제이 리프턴Robert Jay Lifton은 당시 주체에게 일어난 바로 그 무수하고 다양한 변화 가능성에서 한 가지 문제를 포착해 냈다. 주체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꿔야 하는 압력까지 받게 되면서 이 시대 특유의 불안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의 혼란과 관련한 불안은 오히려 확실성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이는 “근본주의 교파들과 각종 전체주의적 영성 운동들”로 표출된다.
오늘날 새로운 시대의 불안은 앞서 언급한 두 시대의 불안과 흡사해 보일 수 있다. 오늘날의 문화에서도 경제적 불확실성은 불안의 주원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주원인은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바꾸려는 끊임없는 욕망, 그리고 행동의 지침이 되는 본보기의 부재와 관련해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더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이런 불확실성은 또한 사람들이 근본주의적 종교에 의지하고 사회적 제약들을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며 이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전체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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