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노동,
인생 2막을 열다
“나, 내일부터 노가다 시작해.”
27년간 기자로 살아온 사람 입에서 ‘노가다’란 말이 나오자 아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농담이겠거니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돈이 필요했고, 아직 돈을 벌 나이였다. 퇴직 후 등산이나 다니며 하릴없이 소일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방 늙은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놀며 세끼 꼬박꼬박 찾아 먹는 삼식이가 되기도 싫었다. ‘삼식이’는 은퇴한 중년 남성이 집에서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은어다. 차라리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영식이’가 편했다. 어느 날부터 마음에 내려앉은 묵직한 감정들이 끼니조차 편치 않게 만들었다. 눈칫밥은 눈치 주는 사람의 가학이 아니라 스스로 눈치를 보는 자학에 가까웠다.
“그 몸으로? 어떻게? 어쩌려고?”
아내는 여전히 설마설마하는 표정이었다.
“내 몸이 어때서? 혹시 친척들 알까 봐 창피해서 그래? 남편 은퇴하고 노가다 나간다고?”
“그건 아니고…….”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막노동에 대한 인식은 애초부터 곱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인생 막장’, ‘마지막 정거장’, ‘밑바닥 인생’이라는 폄훼와 하대, 조롱과 멸시를 해왔다. 어렸을 땐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라며 처참히 낙인찍는 모습도 심심찮게 봐왔다. 하루 벌어 하루 버티는 하루살이, 술 먹고 고함치는 주정뱅이, 지저분한 옷과 찌든 냄새로 불쾌함을 주는 동네 아저씨 따위의 취급을 받았다. 그건 잔인하고 못된 추문이었다.
그렇다 보민 나의 생각도 알게 모르게 곡해된 직업관에 머물러 있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선택하는 밥벌이의 마지막 카드 정도로 말이다. 한마디로 막노동이란 내 인생과는 영영 상관없을 것 같은 세계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편견들과 부딪치기로 이미 마음먹은 터였다. 건설현장 입문 시 필요한 건설업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부터 취득하기로 했다. 생애 첫 건설 쪽 교육이라 낯선 것투성이였지만 모두 절박한 표정이어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10평 남짓한 교육장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만석이 되려는 찰나, 한쪽 귀퉁이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이 교육은 건설일용근로자가 타 현장으로 이동할 때마다 받아야 하는 안전교육을 한 번에 끝내기 위한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단 하루를 일하더라도 이수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50분 수업 듣고 10분 쉬고를 네 번 하면 끝난다. 4시간 동안 건설공사의 종류, 시공 절차, 산업재해 유형별 위험 요인 및 안전보건 조치를 배웠다. 교육 내내 다치고, 깨지고, 깔리고, 무너지고, 실려 가는 영상이 시연됐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건설현장이 마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응급실 로비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교육이 끝나고 이수증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고개 각도를 조정해줬다. 그런데 증명사진이 박힌 이수증을 보고는 까무러칠 뻔했다. 범죄 피의자들이 찍는 머그샷(mug shot)처럼 나온 것이다. 그러나 번복할 수는 없었다.
‘아, 이제 진짜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구나.’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 일이 솔직히 두려웠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래도 이왕 마음먹었으니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교차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격지심을 떨쳐내고 할 수 있다는 주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수증을 가슴에 품은 채 새롭게 시작될 제2의 인생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7년 기자 생활을 갈무리한 나의 막노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
겨울 새벽은 방 안에서도 시렸다. 날카로운 면도칼에 베인 듯 얼얼했다. 창문 밖의 하늘은 검게 질려 있었다. 모든 잠든 오전 4시 반. 알람이 울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세포들 사이사이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뼈마디와 핏줄도 깨어나지 못하고 더욱 웅크렸다. 출근 대비 1시간 정도 이른 시각이었다. 첫 출근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신세계였기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부스럭 소리에 아내가 깼다. ‘이 인간, 진짜로 막일 나가려나 보네.’라는 표정이었다. 아내가 부엌에서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내더니 이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끼니를 차려냈다. 그 온기와 웃풍이 맞물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쳤다.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아내에게 번외 노동을 시키는 것 같아서.
휴대폰 속 온도계가 영하 1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길이 문제였다. 전날 아내가 자동차로 출근시켜주겠다는 걸 거절했던 터였다. 깜깜한 데다 도로마저 얼어 있어 오토바이를 타면 위험하다는 얘기를 귓등으로 들었다. 첫날부터 밥을 차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차까지 몰게 하는 수고로움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눈비가 오거나 한파가 닥치는 날엔 버스를 타려고 미리 노선도 알아두긴 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흉내만 내고 중무장에 나섰다. 팬티 위에 내복 2개, 그 위에 보온 셔츠, 또 그 위에 난방 점퍼를 입었다. 아랫도리, 윗도리,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바람구멍 없이 동여맸다. 거울을 보니 영락없이 눈만 빼꼼 나온 불곰이었다. 아내가 차를 태워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추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이쿠, 큰일 났다는 생각과 집으로 되돌아가면 모양 빠진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건설현장은 집에서 자동차로 30분, 오토바이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가속 레버를 당겼다. 오토바이는 둔탁한 굉음과 함께 칠흑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맞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뼈가 시리고 뺨 맞는 것처럼 아팠다. 아내가 태워준다고 할 때 그냥 말 들을 걸 싶었다. 때늦은 후회가 오토바이 뒤꽁무니에서 활활 타올랐다.
현장에 도착했는데도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너른 공터에 이미 많은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오토바이 번호판을 보니 평택, 이천, 거제, 부산, 광주, 인천 등 전국 각지의 ‘부르릉’이 모두 모인 듯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여기가 베트남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나는 현장 옆 간이식당에서 업체 직원을 만나기로 선약이 돼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 여성이 전화를 받는 게 보였다. 손을 들어 내 쪽을 표시했다. 그도 나를 알아본 듯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직원은 신입을 맞는 일이 귀찮다는 듯 약간은 권태로운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봤다. 내 인상착의와 주민등록증 사진을 번갈아 확인한 그는 서류에 사인을 받고 나서 장비를 인계했다.
“이 일 처음이신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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