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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1902년 5월 12일, 대한제국 육군의 암구호는?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현역으로 마친 사람이라면, ‘암구호’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암구호는 군대에서 쓰이는 암호로, 묻고 답하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다. 캄캄한 밤중에 보초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 때, 보초병은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기 어렵다. 이때 미리 정해 놓은 암구호로 묻는다. 예를 들어 오늘의 암구호가 ‘나비/바다’라면, 보초병은 ‘나비’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바다’라고 대답하면 아군임이 밝혀진 것이지만, 만약 답변을 못하거나 ‘바다’가 아닌 다른 단어를 대면 우리 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해 주는 암구호는 군대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밀 사항이므로, 밖으로 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매우 주의한다. 암구호는 매일매일 바뀌고, 정해진 시간에 군대 전체에 배포되어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모두가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대의 암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데, 그중 『삼국지』의 ‘계륵鷄肋’이 유명하다. 조조가 한중 땅을 놓고 유비와 싸우는 중에 나아갈지 물러설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부하가 조조를 찾아와 그날 밤의 암호를 알려 달라고 하자, 조조는 ‘계륵’이라고 답했다. 또 다른 부하 양수가 이날 밤의 암호가 계륵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짐을 싸서 철수를 준비했다. 계륵은 ‘닭의 갈비’로,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가리킬 때 쓴다. 즉, 한중 땅에 대한 조조의 심정이 계륵이라는 암호에 드러난 것이었다. 과연 양수가 예측한 대로 다음 날 조조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조선시대의 군호
조선시대 군대에도 암구호와 같은 것이 당연히 있었다. 이를 ‘군호軍號’라고 하며, 옛날 문헌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필자는 우연히 조선시대의 군대 문서 몇 장을 발견했는데, 말단 부대에서 기록해 놓은 일지와 보고서였다. 그 가운데 그날그날의 군호와 이를 전달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 있어서 흥미를 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에서 군호를 관리했다. 매일 오후 4시 무렵 병조에서 3품 이상의 당직 관리가 그날의 군호를 써서 승정원에 올리면, 임금이 직접 결재했다. 결재가 난 군호는 29장을 만들어서, 국왕이 보는 것 2장을 제외한 나머지 27장은 각 부서의 담당자에게 매우 은밀하게 전했다.
군호는 흘려 쓰거나 초서로 쓰는 것은 절대로 금했다. 왜냐하면 한자를 흘려 쓰면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초서로 쓰거나 흘려 써서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글자를 잘못 써서 담당 관리가 처벌받은 예를 보기로 한다.
정조 18년1794 5월 22일, 이날 군호는 ‘경점更點’이었다. 대궐을 순찰하는 장교가 군사에게 군호를 물었더니, 한 곳은 ‘경점’이라고 대답했고, 다른 한 곳은 ‘경묵’이라고 답했다. 경묵이라고 잘못 대답한 이유를 확인해 보니, ‘점點’ 자를 비슷하게 생긴 ‘묵黙’ 자로 혼동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일로 담당자 두 사람이 귀양을 갔다.
군호에 관한 제반 규정은 매우 엄격해서, 왕이 군호를 결재할 때는 재상이라 하더라도 이를 볼 수 없었다. 『임하필기』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조선 말기의 인물 이유원은, 1880년 1월 어느 날 고종을 면담한다. 이 자리에는 당시 일곱 살의 세자후에 순종도 함께 있었다. 이때 군호의 결재가 올라왔는데, 고종은 옆에 있던 이유원에게 군호를 본 일이 있는지 물었다. 이유원은, 군사 담당자가 아니면 현직 재상이라도 군호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좌의정과 영의정을 모두 지내고 당시 영중추부사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도 군호는 볼 수 없는 것이 규정이었다.
군호와 관련된 재미있는 자료로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것이 있다. 이 자료는 1794년 5월 3일 당시 병조참의 윤장렬이 군호의 결재를 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그날 정조에게 올린 군호는 ‘장양長養’이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왕자후에 순조가 정조 곁에 있었는데, 왕자가 이 결재 서류에 ‘태평太平’이라고 두 글자를 쓰고 그 밖의 낙서도 했다.
고종 때 세자가 임금 옆에서 군호를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도 왕자에게 군호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은 어린 아들을 집무실에 데리고 나와 나랏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줌으로써, 후에 아들이 임금이 되었을 때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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