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의 출발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이 책은 『김규식 평전』의 제4부로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45년 말까지를 다룬 이 책의 줄거리는 필자가 1985년 한국 현대사에 대한 첫 걸음마를 떼면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학부생들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는데, 한국 현대사를 다룬 적절한 통사, 개론서, 안내서를 찾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각 도청이 발행한 도사, 시군지 등의 해방 직후 현대편을 복사했다. 깜짝 놀랐던 것은 수십 개 도·시·군의 현대편을 복사했는데도 그 분량이 수십 쪽을 넘지 않았다는 점이다.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은 가물에 콩 나듯 등장했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나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마치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는 공백과 진공의 상태였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공교육이나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는 가르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시기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등을 처음 탐구해 한국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이들의 연구에는 사실과 평가가 혼재되어 있었고, 일종의 선험적이고 선언적인 의미를 지녔다. 예를 들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선총독부와의 타협의 산물로 탄생했는데, 어떻게 건국의 준비 기구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읽어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나아가 건준이 좌우합작 기구로 출발했으나, 조선공산당조공 등 좌익의 우세와 이에 맞선 우익의 대립 및 탈퇴로 민족통일전선 기구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렸다는 설명도 요령부득이었다. 이에 맞서 한국민주당한민당 측은 건준이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아 친일정부를 수립하려 한 공산주의자 여운형의 책동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미군정이 진주한 이후 벌어진 한민당의 권력 장악과 그 실체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곤란했다. 해방 직후 1945년 말까지 벌어진 한국의 정치적 격변에는 충분한 자료나 합리적 설명이 결여되어 있었고, 전체적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언뜻 중요한 사실과 비밀의 편린이 번쩍인 것 같았지만, 실체와 전체상은 미로와 미궁의 세계였다.
때마침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제1권1981의 복사판을 서점에서 구입했는데, 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는 해방 직후사 관련 자료가 수십 쪽에 그쳤다면, 그의 책에는 한국에서 전혀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지방 군 단위의 한국 현대사가 거의 100여 쪽에 걸쳐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남한의 거의 모든 지방 군 단위의 생생한 해방 직후 역사가 건준―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정확한 자료에 근거해서 밀도 있게 설명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해방 직후 중앙 및 지방 정치사에 관해서는 커밍스의 책을 뛰어넘는 연구를 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밍스는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의도적으로 마멸되었고, 그 시대를 증명하는 자료도 존재하지 않아 객관적인 역사의 부재로만 기억되던 해방 직후의 역사를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측면에서 커밍스는 지워지고 잊힌 현대 한국의 역사를 미국 자료를 통해 복원해서 한국인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나아가 그 구조와 의미를 미국의 수준, 한국의 수준, 중앙과 지방의 차원에서, 그리고 미국인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대와 기억을 의도적으로 마멸시켜야 했던 시대의 유산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한국전쟁이 아니라 한국전쟁의 ‘기원들’ 전문가이며, 더 정확히는 주한 미군정 시기 남한 현대사 전문가였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 초보적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커밍스가 보여준 학문의 세계는 원숙하고 헤아릴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학부생 때 떠듬떠듬 읽은 그 책의 충격과 전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수록 펼쳐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 그 세계를 능수능란하게 설명해내는 깊은 통찰력, 미국 대외정책·대한정책의 구조와 남한 중앙정치와 지방인민위원회의 역사 등이 눈보라처럼 매섭고, 번갯불처럼 찬란하게 빛을 발햇다. 가장 큰 충격은 한국 현대사를 외국인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는 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거나 가르치지 않는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다른 한편 이는 평범한 한국인에게 자괴감과 상실감을 줌으로써 한국인 연구자로서의 역할이라는 자각과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에 접할 수 있었던 한국 현대사 연구는 한민당 출신으로 김규식의 비서를 지낸 중도파 송남헌의 『해방3년사』, 남조선로동당 출신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1980년대 첫 번째 한국 현대사 연구자였던 홍인숙·안종철 등의 건준 연구, 기자 출신 심지연의 『한국민주당연구』, 계몽적 수준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 반공적 입장에서 실사구시를 표방한 김준엽·김창순의 기념비적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미국의 보수·반공적 시각을 반영했으나 선구적인 이정식·스칼라피노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미군정기 전남미군정에 참여했던 그랜트 미드Grant Meade의 미군정 연구, 『시카고 선』의 기자였던 마크 게인Mark Gayne의 『일본일기』Japan Diary 등이었다. 유익하고 선구적인 연구였으나, 대부분 회고록이나 경험담, 인상비평적 선험적 연구, 연대기적 자료집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설명한 책을 찾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혀 다른 연구 세계와 연구 수준을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커밍스의 설명은 미군정의 진주 이후 1947년 말까지 남한에서 벌어진 중앙정치와 지방정치를 미국 자료에 근거해 추적한 점에서 미덕과 장점이 있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남한 내 혁명과 반혁명, 미국 대외정책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국가주의nationalism, 봉쇄containment 및 롤백roll-back: 반격 등을 그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통찰력, 누구도 접근하거나 보지 못한 미국 문서보관소의 자료에 근거했다는 자신감이 그 책의 저류에 흐르고 있었다. 한국전쟁 개전과 관련해 음모설이나 추정, 중대한 사실 오류로 빛바랜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1990보다는 제1권이 학문적으로 탄탄하고, 자료적 근거가 명확하며, 논리와 설명에 흔들림이 없었다. 커밍스의 연구에 후속한 1980년대의 건준, 인공, 미군정기 등 한국 현대사 연구들은 이런 측면에서 커밍스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다. 커밍스가 발굴한 미국 자료들의 원천을 따라가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한국이라는 작은 지역을 통해서 미국의 대외정책 일반을 탁월하게 설명한 입론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이 때문에 커밍스는 과도한 찬탄과 과중한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모차르트를 시기한 살리에르의 시선이 신문지상을 통해 명성을 얻으려던 자칭 한국 현대사 학자들 사이에 넘쳐났다. 날선 서평과 비평이 고조될수록 커밍스의 명성과 영향력이 증폭되는 기현상이 지속되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다른 측면에서 학문적 야망을 가진 한국 연구자들에게 궁극적 자극의 원천이 되었다. 방선주 교수는 커밍스가 활용한 자료의 보고寶庫를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사실상 한국인 연구자에 의한 한국 현대사 연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방선주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실현 가능성을 펼쳐 보여준 개척자이자 안내자였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서 수십 년간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온 방선주 교수는 주한미군이 『주한미군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HUSAFIK 편찬을 위해 수집한 주한 미24군단 정보참모부 군사실 문서철, 한국전쟁기 미군이 북한에게서 빼앗은 소위 ‘북한노획문서철’ 등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이고 귀중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그 중요성을 알려줌으로써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을 매혹시켰고, 새로운 미국 자료의 세계로 인도했다. 방선주 교수가 쓴 주한미군 군사실 문서철, 북한노획문서철에 대한 연구 및 해제는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빅뱅에 맞먹는 충격을 선사했고, 동시에 미국 자료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는 학문적 나침반學問指南을 제공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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