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자크 루소
감수성의 혁명, 상상력의 저주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일생은 화해할 길 없는 모순의 드라마였다. 이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 시대 전체와 불화했고,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과 불화했다. 그는 계몽의 세기, 빛의 시대 18세기 한가운데서 아득한 어둠을 보았고, 그 어둠의 심장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가 빛을 향해 발버둥치면 칠수록 어둠의 심장은 더 억세게 조여들었다. 출구 없는 시대의 자궁 안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가망 없는 사투를 벌였다.
모든 것이 모순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기에 집착했지만, 꼭 그만큼의 강도로 자기를 혐오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문학과 예술이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성토했지만, 곧 이어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연애소설을 씀으로써 자기 자신을 배반했다. 그 배반은 너무나 철저한 배반이어서, 그가 쓴 소설은 뒤따라오는 모든 소설 문학의 원류를 이루었고 낭만주의와 감상주의의 신기원을 열어젖혔다. 자신의 저작에서 가정생활의 소중함을 그토록 강조했지만, 그는 평생토록 가정다운 가정을 꾸려본 적이 없었다. 공화국 시민의 삶을 한없이 찬양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시민의 질서 바깥을 떠돌았다. 그는 영원한 이방인, 영원한 방랑자, 영원한 떠돌이였다.
그가 쓴 《에밀》은 근대 교육학의 출발점이었다. 최초로 어린이를 발견한 저작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작품의 저자는 현실에선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남김없이 고아원에 버린 비정한 남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상력 안에서만 어린이를 사랑할 수 있었다. 자기 삶에 부착된, 삶의 일부인 아이, 곧 자식을 사랑하기에는 그의 부성이 너무 허약했다.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어린이였다. 어린이가 어린이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어린이가 어린이를 키울 수는 없다. 이 영원한 어린이는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았고 거기서 교육학의 모든 위대한 원리를 끌어냈다. 그의 가공할 상상력은 현실의 무능력을 지칠 줄 모르는 사유의 동력, 창작의 동력으로 바꾸어냈다. 그는 자기 시대의 부자와 귀족과 권세가를 끝없이 공격했지만, 그들의 아량과 호의와 후원이 없었다면 생계를 이어갈 수도 없었고 자기 책을 출판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모순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순, 그 불화의 틈새에서 독창성으로 빛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인류사의 진정한 정신의 도약이 불완전성의 산물임을, 불완전한 인간의 커다란 내적 모순의 산물임을 증거하고 있다.
“나의 출생은 나의 첫 불행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조국 제네바는 2세기 동안 자유와 독립을 유지해 온 도시 공화국이었다. 당시 파리의 인구가 50만 명이었던 데 비해 이 도시의 인구는 1만 8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1712년 루소가 아버지 이자크 루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 이 작은 도시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16세기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심어놓은 엄격한 청교도주의였다. 루소는 첫 호흡 때 들이켠 이 공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시계 제조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제네바 시민계급 하층에 속했다.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던 아버지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공화국 제네바를 자랑스러워했다. 공화주의는 루소가 들이켠 공기의 또 다른 성분이었다.
모순 덩어리 그의 삶은 출발선에서 벌써 뒤엉켰다. 어머니 쉬잔 베르나르가 출산 후유증으로 루소를 낳은 지 9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의 목숨을 앗았다. 나의 출생은 나의 첫 불행이었다.” 어린 루소는 아버지의 우산 아래서 유모와 고모의 손에 키워졌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했고 그래서 몹시도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어린 아들을 붙들고 울었다. “장 자크야, 엄마 이야기를 하자꾸나.” “응, 아빠! 또 울게 될걸.” “아, 엄마를 돌려주렴. 네가 단지 내 아들일 뿐이라면 이렇게 널 사랑하겠느냐.”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이 아들 탓임을 이렇게 은근히 강조했다. 루소의 자의식은 죄의식과 함께 피어났다. 자아의 호수엔 죄의식이 일으킨 불안의 파문이 번졌다. 루소의 자아 불안은 이후 근대인의 정신을 휩쓸게 될 그 자아 불안을 예고했다.
어린 루소는 대여섯 살 때 글을 깨우치고 곧 맹렬한 독서광이 되었다. 여섯 살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난 이 독특한 현상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를 따라다닐 터였다. 루소는 어머니가 남겨준 소설책들을,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물려준 놀라운 감수성으로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아버지와 나는 저녁 식사 후에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고서는 결코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아주 짧은 기간에 지극히 빠른 독서력과 이해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정열에 관해 내 나이 또래로서는 유례가 없는 지능을 갖추게 되었다.”
어머니 서가의 소설책을 다 읽자 이제 루소는 아버지 서가로 눈을 돌렸다. 일곱 살 루소는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아버지가 일하는 동안 그 책들을 읽어드렸다. 그때 내 나이 또래로서는 보기 드문, 아니 아마도 유례없는 취미를 그런 책들에 붙였다.” 소설을 읽고 고전을 탐독하는 루소는 어린이였지만 어린이가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은 전혀 어린이답지 않았다. 나는 항상 어른처럼 느끼고 생각했다. 커 가면서 비로소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다만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반대쪽으로 더 멀리 나아갔음을 그의 삶은 보여준다.
어린 루소가 특히 빠져든 책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었다. 루소는 이 고대 그리스 작가가 펼쳐놓은 위인들의 세계에 몰두해 허약한 현실을 잊었다.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이 되어 영웅들과 함께 모험에 뛰어들고 도전을 감행했다. 자유를 향한 정열이 솟구쳤다. 상상력은 무한대로 펼쳐졌다. 이때부터 루소 삶의 전형적인 모습, 곧 책의 세계야말로 현실이 되고 현실은 낯선 것이 되는 뒤집힌 삶이 시작되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