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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지옥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2021년 7월 5일 월요일.
아침부터 날씨가 우중충했다. 구름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뭔가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불볕더위는 주춤했지만, 대신 서울 전체가 거대한 사우나가 된 것 같았다.
옷장에 먼지 쌓인 채 걸려 있는 은은한 남색 맞춤 정장을 꺼내 입고 수제 구두로 구색을 맞춘 다음, 온몸에 쩍쩍 달라붙는 습도를 느끼며 한국외대로 향했다.
이날은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지원해주는 GYCGlobal Young Challenger 면접날이었다. 당시 나는 천안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지옥 같은 회사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해외 취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의 첫 번째 문을 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몇 달간 머리숱의 15퍼센트 정도를 떠나보냈고 왼쪽 아래 치아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매일 퇴근 후 파김치처럼 늘어진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아 양쪽 뺨을 때려가며 오픽OPIc 성적을 받았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상실한 인류애와 지하를 뚫은 낮은 자존감을 들키지 않으려고 두 달 동안 7킬로그램도 감량한 터였다.
면접은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첫 번째 시험대였다. 다행히 면접 분위기가 괜찮았다. 한 면접관은 “나머지는 나중에 GYC에서 만나서 얘기합시다”라며 합격 시그널까지 주었다.
‘아싸! 이 정도면 백퍼 합격이다!’
오늘은 축배를 들자. 그동안 했던 개고생을 보상받기에 충분한 날이다. 오랫동안 참았던 중국 음식과 연태고량주를 맘껏 허락해야지. 바리바리 포장한 음식을 들고 나의 사랑스런 보금자리로 향했다.
천안시 두정동에 자리한 리첸스 빌라. 나의 첫 전셋집이자 요새이며 든든한 보금자리에서, 상사에게 사직서를 어떻게 집어던질지 상상하며 오늘밤을 즐기리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게 오늘 오전, 집을 나설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1층의 공동현관 출입구부터 닫힘 버튼만 닳은 엘리베이터, 10층 복도, 발을 옮길 때마다 머리 위에서 켜지는 자동센서 전등…….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10층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1004호로 향하는 동안 지나치는 다섯 가구의 현관문에, 평소대로라면 음식점이나 헬스장에서 붙인 화려한 전단지가 가득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날은 전단지 하나 없이 각 현관문마다 흰 종이 한 장이 각을 맞춘 듯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안내문
사건: 2021타경6036 부동산임의(강제)경매
채권자: 조○○, 소유자(채권자겸소유자) : 이○○
위 사건에 대하여 귀하가 사용(점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경매가 신청되어 법원의 명령에 따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소속 집행관이 부동산의 현황, 점유관계, 차입 또는 보증금의 액수, 그 밖의 현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 방문하였으나 귀하를 만나지 못하여 안내문을 드리오니 소유자 및 임차인, 점유자께서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아래 연락처로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귀하가 소액 임차인 또는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일 때에는 다음 서류를 첨부하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경매4계(041-620-3074)에 배당 요구 종기일(2021.09.23.)까지 권리신고 및 배당요구 신청서를 제출하셔야만 법률의 규정에 따른 보호를 받으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음-
1. 해당 부동산에 전입한 일자가 기재된 주민등록표(등)초본(주소변동사항포함) 1통
2. 임대차계약서(전·월세 계약서) 사본 1통
계약서상에 확정일자를 받은 경우에는 그 확정일자가 선명하게 나오도록 사본하여 주시고, 상가·공장 등인 경우 관할 세무서 발행의 ‘상가건물 임대차 현황서’를 함께 첨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3. 해당 부동산이 다가구가 거주하는 건물인 경우 건물의 내부 구조와 점유 부분을 표시한 도면
도면은 면적 등이 정확히 나타날 필요는 없고, 임차인의 점유 부분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표시하면 됩니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집행관 사무소
‘이게 뭐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이윽고 심장이 아려왔다. 설마 우리 집에도 붙어 있나? 나의 사랑스럽고 든든하고 행복한 요새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흰 안내문은 1004호 앞에도 붙어 있었다. 10층의 어느 현관문도 예외는 없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 깊은 곳 어디쯤에 처박아둔 전세 계약서를 한참 찾았다. 밤 열 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계약서에 기재된 건물주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지만 내가 그동안 건물주의 연락처라고 알고 있었던 전세계약서상의 번호는 알고 보니 건물관리소장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은 관리소장은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 뭐하는 짓이냐며 건물주의 진짜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화를 냈다. 순간 당황했지만, 그보다는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좀 더 컸다. 이번에는 최대한 조심스레 진짜 건물주의 번호를 눌렀다. 진짜 건물주가 화를 내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자초지종을 물을 생각이었으나, 건물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있는 동안 음식은 식어갔고, 연태고량주는 미지근해졌다.
금요일에 GYC 합격 소식을 들으면 이번 주말에 집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단 보름만 프로그램 일정이 빨랐어도 이런 안내문을 받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갔고 시간을 되돌릴수록 과거에 가정이 붙었다. 어느 하나만 달랐어도 천안에 취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취직을 하더라도 이 회사에 오진 않았을 텐데, 그럼 이 집에는 안 왔을 텐데, 이런 안내문을 받진 않았을 텐데 싶었다. A4 한 장짜리 안내문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스쳐갔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포장해온 음식은 뜯지도 않고 연태고량주만 쭉쭉 들이켰다. 두 달 동안 다이어트를 한 데다 하루 종일 밥 한 끼를 제대로 못 먹었더니 텅 빈 위가 불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 꿈과 계획도 함께 불타올랐다. 거하게 취하고 나니 좀 전에 본 경매 통지서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해졌다. 자고 나면 해결돼 있겠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이따위 종이 한 장 때문에 내 인생에 별 문제가 생길 리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내 책상 위에 놓인 경매통지서는 내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2년 하고도 3개월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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