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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륭사
아스카飛鳥시대 백제관음의 고향을 찾아서
도래인의 고향
아스카와 나라奈良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가는 답사의 핵심이며, 일본 고대문화의 하이라이트이다. 일본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전 과정이 아스카에 남아 있고, 마침내 그네들이 그토록 원하던 고대국가를 탄생시킨 곳이 나라이다.
아스카를 가면 우리나라의 부여가 떠오르고, 나라의 옛 절을 보면 경주를 연상하게 된다. 볼거리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문화유산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난다. 아스카에는 5세기 가야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에 철과 말〔馬〕, 그리고 가야 도기문화를 전해준 흔적과 6세기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자취가 역력히 서려 있다. 그리고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하면서 시작된 나라시대는 일본 고대문화의 정점이었다. 무엇보다 아스카·나라의 봄 벚꽃과 가을 단풍은 참으로 아름답다. 일본다운 색감이 무엇인지를 여기처럼 잘 보여주는 곳이 없다. 아스카 문화의 결실을 법륭사, 고도 나라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을 동대사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교토로 향할 답사기의 첫 장章을 법륭사에 할애하고 있다.
법륭사의 어제와 오늘
법륭사法隆寺, 호류지 이야기는 쇼토쿠 태자가 601년에 이곳 이카루가에 궁을 짓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태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불화가 생기면서 우마코의 전횡에서 피신할 생각에 사랑하는 아내 선비膳妃, 본명은 膳部菩岐々美郎女의 고향인 이 한적한 시골에 궁을 짓기 시작하여 60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때 근처에 세운 절을 법륭사의 효시로 본다. 이때 태자가 사찰 건립 재원으로 희사한 영지는 16세기 말까지 법륭사 운영의 큰 재원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법륭사 금당에 안치된 청동약사여래좌상의 광배에는 쇼토쿠 태자의 아버지 요메이用明 왕이 병의 치유를 빌며 스스로 가람 건립을 발원했으나 얼마 안 가 사망했기에 유지를 받들어 스이코推古 여왕과 쇼토쿠 태자가 607년 다시금 불상과 절을 완성했다는 명문이 쓰여 있다.
법륭사라는 이름은 창건 무렵이 소가씨의 씨사인 법흥사法興寺, 오늘날의 아스카지가 준공되어 불상이 안치되던 때606인 만큼 태자가 이에 필적할 만한 절을 세우고 일어날 흥興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융성할 융隆자를 넣어 지었다고 한다.
태자는 이카루가궁에서 국정을 살피고, 법륭사에서 불경을 탐구하며 경전의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러다 621년 12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았다. 그리고 한달 뒤인 이듬해 622년 1월에는 태자 자신이 병으로 누웠는데, 태자의 병을 간호하던 아내가 2월 21일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그다음 날인 22일에 향년 49세로 운명했다. 석달 사이에 태자 집안은 3명의 초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때 백성들은 비탄에 빠져 통곡했다고 『일본서기』가 전한다.
태자 서거 후, 쇼토쿠 태자의 아들은 부친의 극락왕생을 위해 도리 불사에게 석가삼존상을 주문하여 623년 법륭사에 봉안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기사가 맞는다면 670년 법륭사는 전소되었고 710년 무렵 재건된 것이 오늘날 법륭사의 핵심을 이루는 서원가람西院伽藍이다.
그리고 739년 무렵, 교신行信 스님은 쇼토쿠 태자가 살던 이카루가 궁터에 몽전夢殿을 지어 확장했다. 그것이 법륭사 동원가람東院伽藍이다. 이리하여 법륭사는 동서 양원 가람으로 5만 6,500평의 대찰이 되었다.
이후 법륭사에는 몇차례 화마가 덮쳤다. 925년에는 서원가람의 대강당과 종루가 불탔고, 1435년에는 남대문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절 전체를 태우는 대화재는 없었다. 그리하여 1,300여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금당과 오중탑을 비롯하여 아스카시대, 나라시대의 건물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한다. 국보와 우리나라 보물에 해당하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190종 2,300점이나 된다. 이러니 어떻게 법륭사를 다른 절과 똑같이 수평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법륭사에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메이지 연간에 있었던 폐불훼석으로 절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1878년 법륭사는 백제의 아좌 태자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쇼토쿠 태자 초상」을 비롯한 300여점의 보물을 황실에 헌납하고 1만 엔을 하사받았다. 이를 위해 황실은 국채를 발행했다고 한다.
1934년부터는 대보수가 시작되어 금당, 오중탑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수리했다. 그러나 1949년 금당을 해체 수리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금당 1층 내부의 기둥과 벽화가 크게 손상되었다. 완전히 불탄 것은 아니고 색채가 다 날아가 흑백사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 보수 작업은 반세기가량 계속되어 1985년에 이르러서야 완성 기념 법요가 열렸다. 오늘날 법륭사의 사격은 쇼토쿠 태자를 모시는 성덕종聖德宗 총본산總本山이다.
법륭사가 소장한 유물들은 동원과 서원 사이에 있는 대보장전大宝蔵院에 전시되어 있고, 황실에 헌납한 유물들은 전후 정부에 반환되어 ‘법륭사 헌납 보물’이라는 이름으롤 도쿄국립박물관 별관에 제한적으로 전시되어왔다. 그러다 1999년부터는 일본의 유명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가 설계한 법륭사 보물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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