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1
서울 성북동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 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 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역사적으로 일별해보면 성북동은 본래 혜화동에서 고개를 넘거나 삼선교에서 천변길을 따라 들어오는 막힌 골짜기로 한양도성 축조 당시엔 자연 그대로의 산림녹지였다. 그러다 약 300년 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 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北屯桃花’라고 예찬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가 되면서 이 풍광 수려한 골짜기에 권세가들의 별장과 별서들이 곳곳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 성북동 별서’와 학교법인 보인학원을 세운 이종석의 ‘일관정’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오로정’ 등 10여 채의 별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마전골은 여전히 복사골로 유람객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1930년대에 서울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사대문과 가까운 이곳이 새로운 주택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성북동으로 들어와 문인촌을 형성했다.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백양당 출판사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과 이를 물려받은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이 지금도 남아 있고 비록 터만 남아 있지만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도 있어서 이곳이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산실임을 증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곽 아래 응달진 북쪽 산자락에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면서 형성된 북정마을이 있다. 주로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자리 잡은 곳인데 서울에 남아 있는 거의 마지막 달동네이기도 하다.
그후에도 성북동은 여전히 도심과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여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친일문학론』의 임종국, 화가 윤중식, 조각가 송영수, 한국화가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집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영원한 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집’, 최근2020에 타계한 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의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성북동은 시내와 가깝고 자연 풍광이 살아 있다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어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변종하미술관 같은 유수한 사립 미술관들이 들어서 있고, 백석 시인의 영원한 연인인 김자야가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부탁해 아름다운 절집으로 다시 탄생시킨 ‘길상사’도 있다. 이리하여 2013년, 성북동은 서울시 최초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성북천은 복개되어 삼선교에서 삼청터널로 이어지는 성북동 길이 되었다. 이 대로변에 일찍부터 기사식당 쌍다리 돼지불백을 비롯해 게장백반의 국화정원, 국밥집 마전터, 국시집, 누룽지백숙 등 고만고만한 단품요리 맛집들이 들어섰고 근래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양식당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이곳은 마이카 시대의 유람객들이 편하게 들렀다 가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성북동은 이처럼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표적인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어 우리 같은 답사객들의 발길을 부르고 있다.
성저십리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 성북동은 북한산의 여러 골짜기와 마찬가지로 푸른 숲의 자연녹지였다. 이곳에 있던 성북천은 백악산북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인 응봉과 구준봉 사이에서 흘러내린 약 5킬로미터 길이의 자연 하천으로 수량이 풍부하여 삼선교, 돈암동, 보문동, 안암동 일대를 지나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청계천과 합류해 중랑천으로 흘러들었다. 지금은 거의 다 복개되었고 한때는 안암천이라 불리기도 했다.
1394년 한양도성을 쌓을 때 성곽 바깥쪽 10리약 4킬로미터 이내는 자연녹지로 보존했다. 조선시대의 그린벨트 격이다. 이를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했는데, 세종 때는 여기에 분묘와 벌목을 금지하는 금표禁暴를 여러 곳에 설치했고, 세조 7년1461에는 성저십리 전 지역을 한성부 산하의 방坊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세종 10년1428 때 기록에 호구 1만 6,921가구, 인구 10만 3,328명으로 나와 있다. 그 때문에 한양 주변 국토 관리에 다소 녹지의 여유가 있었다. 성저십리 중 답십리 지역부터 농사를 짓게 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선잠단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행하는 2개의 제단이 있었다. 하나는 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 사적 제436호으로 역대 왕들은 해마다 친히 밭을 경작하며 농경을 장려했다. 이를 친경親耕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곳 성북동의 선잠단先蠶壇, 사적 제83호이다. 선잠은 인간에게 양잠을 처음 가르쳐준 서릉씨西陵氏를 지칭하는 것이다. 선잠단에서는 왕비가 직접 참여하는 선잠제가 열렸다. 이를 친잠親蠶이라고 한다. 두 제단은 국가가 백성들의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보살피어야 함을 확인하는 의례였던 것이다.
세종 때는 각 도마다 적합한 지역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설치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단종 2년1454에는 호조에서 누에 종자를 받아 여러 읍에 나누어주고 양잠을 하게 한 뒤 그 실태를 살펴서 수령을 포상하거나 문책했다고 한다.
선잠단이 성북동 지금의 위치에 설치된 것은 태종 연간1414~30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잠단의 형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다른 제단의 예와 함께 자세히 나와 있다. 단은 길이 사방 2장 3척약 7미터, 높이 2척 7촌약 0.8미터의 석축으로 네 방향 모두에 계단이 나있고 단 주위에는 상하 2단의 담장이 둘러 있는데 길이는 25보로 되어 있다. 1보는 6척약 1.8미터이므로 45미터 정도 된다.
선잠제는 정종 2년1400부터 매년 3월 초사일初巳日, 첫 번째로 巳자가 들어간 날에 행해졌다. 선잠제를 행할 때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의식이 있는데 이를 채상의라고 한다. 이를 위해 선잠단 서쪽에는 채상단採桑壇이 축조되어 있었고 뽕나무는 단의 동쪽에 심겨 있었다.
선잠제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고, 선잠단의 신위는 1908년 7월,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졌다. 이후 선잠단은 폐허가 되었고 단 주위로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오직 석축만 초라하게 남게 되었다. 그러다 100년도 더 지난 2016년에 와서야 선잠단 터를 『국조오례의』에 의거해 다시 복원하고 나라의 건조물임을 알려주는 홍살문도 세워놓았다. 그러나 채상단과 주변의 뽕나무 밭까지는 아직 복원하지 못했고 그 대신 가까이에 ‘성북선잠박물관’을 세워 선잠단의 역사를 시각 자료로 보여주고 있다.
선잠단은 삼선교에서 들어오는 길과 혜화동에서 경신고등학교 고개 너머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위치해 여기가 성북동 역사의 출발점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북동 답사의 출발은 선잠단이 있는 성북동 삼거리에서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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