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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해
부인과 낙관
빈센트
삶은 이렇게 지나가고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이제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나면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다시는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 한마디로 나는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자살하려다가 물이 너무 찬 걸 알고는 강둑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현대 정신의학의 기준에서 정확히 어떤 질환을 앓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미 사망한 지 130년이 넘은 이 천재 화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자주 정신발작을 일으켰고 귀를 자른 적까지 있으며 결국 생을 자살로 마감했다는 정도이다. 빈센트는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주 멜랑콜릭하다며 걱정을 했다. 빈센트는 화가로 생활하기 전,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는 못했다. 신학교는 고사하고 중학교에서도 학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웠고 일정한 직업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림에 흥미를 보인 후 그는 종종 들판으로 나가 네덜란드의 혹독한 겨울에 몸으로 노동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고, 그렇게 그린 그림을 가족들의 저녁식사 시간에 가지고 와서 식탁 앞에 놓고 “오늘은 이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식사해요”라고 하여 가족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려면 50년도 더 기다려야 하는 시대였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항상 아들을 걱정하다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이 빈센트 때문이라고 여겨 평생 빈센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 빈센트를 감싼 것은 그의 동생 테오였다. 테오는 종종 이상행동을 보이는 형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런 형이 변변한 수입도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물적·심적으로 도왔다.
빈센트의 생전 행적에 대한 많은 기록에서 주위 사람과의 교류의 어려움, 집착적인 행동, 자제심이 부족한 충동성 등의 행동 패턴들을 볼 수 있다. 빈센트는 벌이가 부족해 모델을 고용할 수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려웠지만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이 그 나름으로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많은 이들이 빈센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모델이 되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라부 여인숙 2층에서 생활하며 생의 마지막을 보낼 때 하루 중 유일하게 말을 한 순간은 아침에 식사하러 내려와 여인숙 주인의 딸에게 밥을 달라고 할 때뿐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시간에 그는 화구를 짊어지고 들판에 나가 그림만 그렸다.
빈센트는 자살로 삶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를 의심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많은데, 역시 1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마을 사람들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던 빈센트에게 쉽게 총이 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그가 총을 맞은 부위가 각도상 스스로 장총을 쏘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곳이라는 점, 그가 총상을 입고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긴 거리를 걸어와 라부 여인숙까지 도달한 후 놀란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점 등으로 볼 때 타살 의혹도 강하게 제기된다. 당시 오베르쉬르우아즈는 파리 부유층의 여름 휴양지였는데, 파리에서 놀러 온 부잣집 도련님들이 어딘지 이상한, 지금 기준으로 보아 그림 ‘덕후’오타쿠처럼 보이는 빈센트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장난 끝에 살인’으로 그의 삶을 끝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이건 타살이건 그의 죽음이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것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빈센트의 병명은 ‘측두엽간질’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우세했다. 의식을 잃지 않으면서 환청, 환각, 불안, 공포심을 느끼는 간질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그의 질환이 전형적인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였다는 가설도 대두되고 있다. 그가 남긴 많은 기록들, “가끔은 머릿속이 멍하지만 또 가끔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생각이 혼란스러워진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공포심을 느낀다” “좀 느긋하게 기다려도 될 일을 너무 서둘러서 말로 하거나 행동으로 옮긴다” “손발을 묶인 채 깊고 어두운 구덩이에 누워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기분이다” 같은 표현들에서 보이는 증상은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호소하는 불안, 공황, 조증 삽화揷話, episode, 증상이 존재하는 시기. 증상이 없는 시기와 뚜렷하게 구분될 때 사용하는 용어, 우울, 무기력감과 매우 유사하다. 그가 자해를 행한 것도 고갱과의 다툼 후 귓불을 자른 것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 이전에도 나무 막대기 등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빈센트의 정신질환을 그가 성적으로 방종한 생활을 한 끝에 얻은 매독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인데, 그가 매독에 걸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한 것 자체가 그의 질환 때문이고 이 역시 일부의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서 보이는 성에 대한 집착 증상과 일치한다. 즉, 인과관계가 거꾸로이다. 알려진 대로 빈센트는 술과 담배에도 탐닉했었다. 의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술과 담배가 내게 위안을 주고 기분을 이완시키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안의 폭풍우가 너무나 요란하게 요동치면 술이라도 먹어서 내 자신을 마비시켜야 한다. (나는) 미친 것이다.” 술, 담배, 성적 방종은 고통을 완화하는 그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빈센트는 상태가 좋을 때에는 그림에 정진했다.
“3일 연속으로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렸다. 낮에는 잠을 잤다. 내게는 밤이 낮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고 색이 충만한 것 같다.”
“가끔은 정신이 아주 명료해지고 자연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내 자신도 잊게 되고 그림 그리는 것도 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좀 두렵기도 한데 상태가 안 좋아지면 다시 우울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정신질환 병력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앞서 얘기했듯이 그가 자신의 귓불을 잘라낸 일이다. 동생 테오가 형의 상태를 좀더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벗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형과 뜻이 잘 맞을 것 같았던 폴 고갱을 형이 살던 아를에 보냈는데, 두 달도 못 되어 고갱이 빈센트와는 같이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을 표명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초상화도 그려주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었지만 고갱 역시 빈센트와 같이 살기에는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결국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짐을 싸들고 빈센트를 떠났다. 바로 다음 날 빈센트는 귀를 자르고 잘린 귓불을 알고 지내던 매춘부에게 건네준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를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동반되거나 종종 양극성 장애와 혼동되기도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의 전형적 증상으로 해석하는 견해들도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의 중요한 증상으로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그리고 이에 대해 자살 혹은 자해로 반응하는 행동적 특성이 있다. 입원 후 그는 극심한 환각에 시달렸고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후 반복되는 증상 악화와 입원 그리고 이를 버티기 위한 과도한 음주는 빈센트의 건강을 더 나쁘게 만들었는데, 그의 인생 말년은 아마도 음주와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신체적 손상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종종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기도 했으며, 술을 마시면 마시는 대로 몸이 나빠졌고 중단하면 중단하는 대로 알코올 중단 후 따라오는 섬망에 시달렸다.
자신의 질병에 대해 치료는 고사하고 진단조차 제대로 내릴 수 없었던 그 시대에 빈센트는 질병이 가져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화가로 활동했던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875점의 회화와 1,000점이 넘는 데생을 남겼다. 그가 생전에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가 그림을 그려 준 사람들도 그 가치를 못 알아보고 그림을 마구간에 처박아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 처연한 감정을 일으킨다. 다음은 빈센트가 죽기 한달 전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이다.
살아온 지난 기억들, 이별한 이들, 죽어버린 사람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떠들썩한 사건들…… 이 모든 것이 마치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기억날 때가 있지요. 과거는 이런 식으로만 붙잡을 수 있나봐요. 저는 앞으로도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아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어요.
1890.6.12.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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