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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 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 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수배령이 내리기 직전 이런저런 이유로 조직을 탈퇴한 상태였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잔인한 자본주의의 기적과 같은 대안이었다. 사회주의 덕분에 자본주의는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를 마련하면서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띨 수 있었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나라들의 미래는 달랐다.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사회주의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데도 나는 감옥 대신 도피 생활을 선택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 감옥에 가서 7년 형을 선고받는다면그 이상의 형량을 받을 확률도 농후했다 서른네다섯에나 사회로 복귀하게 될 터였다. 서른네다섯이라니! 스물여섯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허세 쩔었던 문학소녀 시절, 나는 서른셋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 결심했다. 서른셋,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버린 나이, 보잘것없는 내가 그 이상 살아있는 건 오만이라 믿었던 것이다. 실소를 금치 못할 유치한 생각이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는 그랬고, 서른네다섯에 출소하느니 숨죽여 숨어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3년 동안 숨어 살았다. 거처는 『남부군』을 쓴 이태 선생이 마련해주었다빚을 갚을 겨를도 없이 선생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죄송할 따름이다. 3년 동안 숨죽여 살았던 잠실주공1단지, 바퀴벌레 들끓던 그 낡고 비좁은 아파트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밤이 되면 단지 내를 배회하고, 낮에는 종일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영화를 봤다. 못해도 하루에 서너 편 이상 봤을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얻어온 비디오는 테이프 돌아가는 쪽에 문제가 있어 볼펜으로 누르지 않으면 자꾸만 테이프가 씹혔다. 종일 볼펜으로 누르고 있으니 손가락이며 손목이 성할 리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손가락에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듯하다.
그 시절,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지리산이 그리웠다. 백운산을 뒷산으로, 지리산을 앞산으로 보고 자란 탓인지 모른다. 서울 살 때도 나는 언제나 산 밑에서 살았다. 집을 고르는 조건의 첫째가 산이었다. 돈 없던 대학원 시절에는 북한산 밑에 살았고, 그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이어지는 곳에 살았다. 등 뒤에 산이 버티고 있어야 숨이 쉬어졌다. 서울 사방이 산인데 가진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는 수배자가 왜 산에를 못 갔냐고? 그 시절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산에 가면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나 푯말이 붙어 있었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여자 혼자 산에, 그것도 지리산에 혼자 갔다가는 수많은 등산객이 나를 간첩으로 신고할 판이었다. 산이 그리워 몸살을 앓다 에라 모르겠다, 무작정 용산에서 밤 기차를 탔다. 새벽 다섯 시쯤 구례구역에 내렸다. 부모님을 뵈러 노상 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나 수배 중이라 부모님을 뵐 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집같이 드나들던 구례구역은 손님 하나 없이 적막했고, 문을 열고 나가자 운무에 쌓인 섬진강이 나를 반겼다. 바람조차 잠잠한데 코끝이 쨍한 겨울날이었다.
지금은 성삼재까지 버스가 다니고 거기서 걸으면 노고단이 지척이지만 그때는 지리산 종주를 하려면 무조건 화엄사 뒷길로 9킬로미터를 하염없이 올라야 했다. 한겨울에는 잠시만 걸음을 멈춰도 뼛속까지 추위가 스민다. 그러니 걸음을 멈출 수도 없어 하염없이 걷기에 딱 좋다. 혼자 하는 산행, 속도를 낼 필요도 없으니 천천히 하염없이 걸었다. 노고단 직전 코재라는 오르막이 있다. 걸으면 코가 땅에 닿는다 하여 코재다. 코도 땅에 닿고 숨도 턱에 닿는 코스다. 코재만 지나면 이내 노고단이다. 그때 노고단 산장은 아빠 친구이자 지리산 지킴이로 유명한 함태식 씨가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알아볼까 싶어 노고단 산장을 그냥 지나쳤다. 내처 걸어 뱀사골 산장에 여장을 풀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데 산장에 이미 대여섯 명의 등산객이 모여 있었다.
그 시절 지리산 산장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침낭만 오백원에 빌릴 수 있었다. 자기 침낭을 가져오는 등산객은 그래도 사는 축에 속했다. 나는 가난했고 당연히 장비가 없었다. 침낭 하나로는 영하 20도가 넘는 산중의 밤을 견딜 자신이 없어 거금 이천 원을 써서 네 개를 빌렸다. 그래도 추웠다. 끓인 물을 플라스틱 수통에 담아 끌어안았다. 조금 낫긴 했지만 여전히 추웠다. 이미 친구가 된 등산객들 몇이 일층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소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흠, 술이라면 나에게는 패스포트 두 병이 배낭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산중의 추위에는 위스키가 제격이지!
사실 패스포트는 내가 마신 최초의 위스키다. 그날, 지리산에서 위스키를 처음 마셨다. 물론 대학 시절 위스키인 줄 알고 캪틴큐를 마시기는 했었다. 캪틴큐는 마시는 누구라도 거의 혼절에 이르게 하는 기적의 술이다. 종일 지끈거리는 두통은 덤이다. 그게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의 술, 위스키의 위력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캪틴큐는 기타재제주, 한마디로 화학약품이나 진배없었다. 돈도 없는 수배자 주제에 먹어보지도 않은 패스포트를 지리산행의 동반자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맥주는 한겨울에 먹기에는 너무 차가울 뿐만 아니라 무겁기도 하고, 소주 또한 3박 4일의 일정을 버티려면 그 양과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독한 위스키라면 두 병으로 3박 4일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간다는 대류의 지식을 밑천 삼아 아무도 없는 이층 침대에 둥지를 틀었다. 일 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과 거리를 둘 속셈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수배자니까. 나는 일 층 사람들이 잠들기 전까지 술을 꺼내지 않았다. 술을 꺼냈다가 그들과 어울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술이 떨어졌다고 아쉬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엄청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나는 조심스럽게 패스포트 한 병을 꺼냈다.
숨죽여 살던 수배자가 숨죽여 패스포트 몇 잔을 들이켜자 비로소 편하게 숨이 쉬어졌다.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래층 남자 하나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일회용 종이잔을 손에 든 채 나는 얼음땡이 되었다. 남자가 이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거 술이에요?”
술잔을 손에 든 채, 아니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좀비라도 되는 것처럼 술이라는 소리에 코를 골며 잠든 사람들이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젠장. 몇 분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사람들은 꼴딱꼴딱 침을 삼키며 내 손에 들린 패스포트를 구세주인 양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코펠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런 젠장. 위스키를 코펠에? 이건 위스키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게 추위 탓인 양 애써 감추며 사람들의 코펠에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나를 제외한 전원이 알딸딸 취했다. 그들은 전작이 있었으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통성명은 개뿔. 내 술이나 축내는 주제에.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채 나는 아무 가명이나 둘러댔다.
“홍은혜입니다.”
막 주워대고 보니 절친의 이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인데 무슨 상관이랴. 그런데 건너편의 누군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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