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 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 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웃기긴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고상욱씨는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의 중심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다. 자본주의의 적인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가 아직 자본의 맛도 보지 못한 깡촌을 택하다니 이 또한 코미디다. 하지만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회주의자가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는 초짜 농부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새농민이 원제 김을 매라고 하먼 풀이 암만, 허고 그때꺼정 잘도 지둘레주겄소. 새농민이 뭐라거나 말거나 풀이 나먼 난 대로 뽑아야제, 워디 농사가 문자로 지어진답디까?”
어머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문자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자에 대한 확신으로 아버지는 『공산당 선언』을 읽었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테다.
“전문가들이 오직이 잘 알아서 써놨겄어!”
어머니는 혀를 차며, 아버지가 돋보기를 낀 채 『새농민』이나 각종 영농서적에 코를 박고 있는 사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섰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 그나마 덜했지만 문자로 짓는 아버지의 농사는 번번이 망했고, 그해 겨울에도 내 부모는 망한 농사의 후유증으로 남은 벌레 먹은 밤을 일삼아 까는 것으로 기나긴 겨울을 견디는 중이었다. 산 그림자가 거뭇거뭇 손바닥만 한 마을을 점령하는 와중에 사상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밤 까다 말고 엉덩이에 좀이 쑤셔 마실을 나갔던 아버지가 웬 여인네 하나를 꽁무니에 달고 왔다.
오가는 것이라곤 바람뿐 적적하기 짝이 없는 산골 겨울에 물릴 대로 물려 있던 나는 드디어 아버지가 한눈이라도 팔았나, 나에게 배다른 형제자매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가, 흥미진진한 연속극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기왕이면 한 재산 뚝 떼어줄, 가진 것 많은 작은어머니를 고대하며 빼꼼 방문을 열었다. 애걔, 광주리를 인 그 여인네는 인물로나 몸매로나 차림새로나 작은어머니감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그 여인은 말하자면 민중의 전형과 같은 생김새였고 나는 취향마저 빼도 박도 못하게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에게 다소 실망하여 찬바람에 진저리를 치면서 냉큼 문을 닫았다.
간 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들려준 바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여인네를 안방으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환갑 다 되어 난생처음 장만한 시골집은 코딱지만 한 방 두개뿐이라 안방에서 오가는 대화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양 환히 들렸다.
“소쿠리를 팔러 왔는디 그만 나갈 때를 놓쳤다마. 엄동설한에 워디서 잘 것이여. 당산나무 밑에서 코를 빼고 안겄는 것을 나가 우리 집서 자자고 델꼬 왔네. 후딱 밥부텀 채리소.”
“참말 죄송시럽그만이라. 따신 방은 무신, 외양간이라도 좋응게 하룻밤 신세 쪼까 지겄어라.”
인물은 박색이었으나 방물장수의 목소리는 갓 지은 찰밥처럼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안방에 쫑긋 귀를 세운 채 나는, 그렇다면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을 뇌세포에 각인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다. 남들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빨치산의 딸이겠지만.
“외양간은 무신. 방이 두 개나 되는디. 내 집이다 생각허고 편히 쉬씨요. 뭐 흔가. 후딱 상 안 채리고!”
아버지의 호통은 나지막한 신음으로 막을 내렸다. 보나마나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벅지를 슬몃 꼬집었을 터였다. 나 주려고 허리 통증 참아가며 실로 꿰지도 않고 선반에 얹어 하루에도 수십번씩 뒤집어 말린 곶감을, 비 한방울 맞을까 비 오면 밭일하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와 소중히 거둬들인 그 곶감을, 아버지가 눈치도 없이 집에 드나드는 아무에게나 맛이나 보라며 넙죽넙죽 집어줄 때도 어미는 어김없이 슬몃 아버지의 허벅지를 꼬집곤 했다.
“나 좀 봅시다.”
곧 두 양반이 내 방으로 건너왔다.
“밥이야 채리겄제만 잠은 딴 디서 자라고 허씨요. 우리 집이 방이 워딨소? 아래 성님댁에 빈 방 많찮애라.”
행여 손님이 들을세라 어머니는 아버지 귓가에 다소곳이 속삭였다. 신기神氣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의 예민한 감각으로 국방군의 포위 직전 아지트를 빠져나와 곡성군당을 살렸다는 전설 속의 혁명가 아버지는 국방군이나 경찰이 포위하지 않는 한 조심성이란 눈곱만큼도 없어 어머니가 귓전에 속삭이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귀를 쓱쓱 비비고는 큰소리로 받아쳤다.
“우리 집이 방이 왜 없어? 야랑 자먼 되잖애?”
“아이고, 다 듣겄소. 워디서 자고 댕긴 줄도 모르는 여자를 워치케 야하고 재운다요? 베룩이라도 옮으면 워쩔라고.”
일주일이 멀다고 부엌 천장의 그을음을 일일이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깔끔쟁이 어머니는 낯모르는 여인네의 벼룩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를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