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약을 해보았나요?
푹 눌러쓴 검은 모자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젊은 그녀는 진료실로 들어와서 의사인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종이만 내밀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손으로 내민 노란 포스트잇에는 7~8가지 종류의 약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의사들 사이에서 ‘어둠의 비기祕器’로 전해져 내려오는 다이어트 처방약이었다. 나는 약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에서 잠시 눈을 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비쩍 마른 몸에 헝클어진 머리와 퀭한 눈, 중독임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선화 씨가명는 지금 다이어트 약을 먹을 정도의 비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약이 너무 강한 데다 3개월 이상 먹으면 의존성이 생깁니다.”
“그냥 똑같이 처방해 주세요.”
“죄송합니다만, 의사로서 그럴 수 없습니다.”
‘처방해 달라, 처방할 수 없다’라며 실랑이가 이어졌고, 끝내 그녀는 “아, 씨.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지”라고 짜증을 내며 진료실을 나갔다. 이미 중독된 그녀는 똑같은 약을 처방받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헤매고 다닐 것이다. ‘나비약’이라고 불리는 이 다이어트 약은 중추신경 흥분제다. 사람을 과도하게 각성시켜 식욕이 없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오지 않고, 입 안이 바짝 마른다시험 치기 직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식욕이 감퇴하기 때문에 다이어트 약으로 쓰이지만 장기간 복용하면 사람이 예민해진다. 그렇다고 약을 갑자기 끊으면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우울해지기도 한다. 다른 약도 그렇지만, 특히 다이어트 약을 포함한 향정신성 약물은 처음부터 의사와 상의해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김선화 씨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은 약을 처방받기 위해 처방전을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떠돌 정도면 이미 심각한 중독이다.
15년간 의사로서 살면서, 나는 다양하게 마약을 썼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에서 근무하면서 강력한 진통제이자 마약인 모르핀morphine에 알약인 옥시콘틴OxyContin, 마취제이자 환각제인 케타민ketamine부터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펜타닐fentanyl까지 전문적으로 사용했다. 응급실과 입원 환자를 볼 때는 모르핀 유사체인 페치딘pethidine과 신경안정제이자 항경련제인 디아제팜diazepam과 로라제팜lorazepam을, 내시경 검사에서는 프로포폴propofol을, 외래에서는 수면제인 졸피뎀zolpidem과 다이어트 약인 펜터민phentermine 등을 처방했다. 이 책에 나오는 마약 중에서 의료용은 거의 다 사용했다. 심지어 내과 의사인 아내는 펜타닐을 맞았다. 이 모두는 의사가 ‘치료’ 목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해 약을 처방한 경우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의사인 나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환자 자신이 특정 약이 필요하다며 처방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응급실에서 일할 때는 주로 40~60대 남성이 손에 진단서를 들고 왔다. 몇 달 심지어 몇 년이나 지나 구겨지고 닳아빠진 진단서에는 ‘급성 췌장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진단서를 보여주면서, 모든 검사를 거절한 채 오로지 수액에 특정 주사만 놓아달라고 했다. 모르핀 유사체이자 마약성 진통제의 일종인 페치딘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면서 온 40대 여성도 있었다. 자기가 ‘공황장애’라며 막무가내로 신경안정제인 디아제팜 주사를 놓아달라고 했다.
외래에서는 수면제인 졸피뎀상품명: 스틸녹스Stilnox과 다이어트 약인 펜터민상품명: 디에타민Dietamin이 주로 문제였다. 30대 초반의 평범한 여성이 순환 근무로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며 수면제를 처방해 달라고 했다. 우울증 등도 없어 처방을 했더니, 3일 전 다른 의원에서 이미 28일 치 처방을 받았다고 컴퓨터에 ‘중복 처방’ 알림창이 떴다. 내가 “환자분 며칠 전에 다른 병원에서 처방을 받으셨는데요?”라고 묻자, “아, 그거 잃어버렸어요”라고 당황한 기색 없이 그녀가 대답했다. 일단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과거 차트를 유심히 살펴보니, 예전에 다른 선생님에게도 약을 잃어버렸다는 핑계를 대며 받아 갔던 적이 있었다. 자의로 수면제를 복용하다 내성으로 한 번에 한 알이 아니라 수 알을 먹어야 겨우 잠에 들 수 있는 상태이거나 약을 불법으로 유통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번은 30대 초반의 여자가 20대 후반의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남자는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여자는 자신을 누나라고 소개한 후 동생이 먹던 약이라며 종이를 보여주고 같은 약을 달라고 했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였다. “환자분, 지금 먹고 있는 약 있어요?” 뭔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는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대답했다. “예, 제가 정신과 약을 먹고 있어요.” “보호자분, 동생이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는데요. 알고 계셨어요?” 여자는 갑자기 짜증을 내더니 동생이라는 남자를 놔두고 혼자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환자와 자칭 보호자란 사람이 나가고 나자 원무과 직원이 들어왔다. “선생님, 그 여자 저번에는 다른 남자를 데리고 와서 약 처방해 달라고 했어요. 병원 앞에서 서성이며 남자들 유혹해서 밥 먹거나 데이트해 주고 남자 이름으로 처방해 간대요.”
이런 경우도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50대 남자가 경찰 두 명과 함께 응급실로 왔다. 붉은 두 눈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남자는 온몸을 떨며 식은땀과 함께 침을 흘렸다. 몸에 벌레가 기어다닌다며 온몸을 긁어대는데 흔히 필로폰Philopon이나 히로뽕ヒロポン으로 알려진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 금단 증상이었다.
외래에서 보는 약물중독자들의 특징이 있다. 첫째, 아픈 증상을 말하는 대신 특정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한다. 그것도 최대한으로마약성 또는 향정신성 약물은 최대 4주로 제한되어 있다. 둘째, 다른 병원에서 이미 처방 받아 ‘중복 처방’ 경고가 뜨는 경우가 많다. 셋째, 잘 씻지 않는 등 위생 상태가 불량하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온다. 넷째, 다른 사람 이름으로까지 처방을 받으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의사라면 다들 최소 한 번 이상 경험하는 일이다. 공공연히 병원에서 이럴 정도면, 향정신성 약물을 포함한 각종 마약이 우리 사회 곳곳에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마약을 하지는 않는다. 마약에 빠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의사인 나는 몸이나 마음이 아프거나 비만인 사람들이 마약성 진통제나 향정신성 약물에 빠지는 것을 자주 본다. 내가 21세기 의사가 아니라 100년 전의 의사였다면, 환자를 근본적으로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종류에 상관없이 통증을 줄여주는 아편이나 모르핀, 헤로인heroin을 처방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고대 잉카제국의 백성이나 노예였다면, 코카인cocaine의 원료가 되는 코카 잎coca leaf을 씹으면서 안데스산맥을 오르락내리락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나 일본의 병사였다면 메스암페타민, 그러니까 히로뽕 알약을 먹으면서 적군과 싸웠을지도 모른다. 흥분제 계열의 코카인과 히로뽕은 허기를 달래고 졸음을 쫓아내는 각성 효과가 있다.
내가 미국에서 40년 일찍 태어났다면 마리화나marijuana, 그러니까 대마초를 피우고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정글을 헤매다가 쉴 때 담배 대신 마리화나를 한 모금 했을지도 모른다. 대마초는 긴장을 풀어준다. 운 좋게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미국 내에서 반전 평화시위를 벌이면서 마리화나를 피웠을 것이다.
“Happy smoke, Love and Peace.”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도,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도 다 같이 마리화나를 피웠다. 마리화나는 전쟁의 상징인 동시에 평화의 상징이었다. 군인과 대학생은 처음에는 똑같이 마리화나를 피웠지만, 다음 마약은 달랐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정글의 군인들은 전쟁의 아픔을 잊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헤로인을 했고, 예술적 영감을 얻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를 원했던 본토의 대학생들은 환각제인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나 엑스터시ecstasy를 했다.
마약을 하는 가족이나 지인, 친구 때문에 마약에 빠질 수도 있다. 친구들이 “너도 한번 해볼래?”라고 권하기에 호기심에 시도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다른 친구에게 똑같이 “너도 한번 해볼래?”라며 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주위에 마약을 하는 가족이나 지인, 친구가 있다면 같이 할 가능성이 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을 직업적으로 다루는 의사는 마약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마약에 쉽게 빠진다.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마약에 빠진다. 몸이 아파서, 일을 하려고, 쉬려고, 영감을 얻으려고, 호기심에,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마약이 옆에 있어서 마약을 하게 된다.
마약은 가히 환상적이다. 당신이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신은 ‘인공 낙원’, ‘천국’을 맛보게 된다. 이제 당신에겐 무서울 것이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야수 하이드Mr. Hyde가 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처럼 아이언맨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약은 곧 저주가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듯, 술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마약은 이제 당신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한다. 당신은 마약을 위해서라면 몸도 팔고, 가족도 팔고, 당신의 영혼까지 팔게 된다. 마약의 끝은 감옥이나 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덤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약을 시작하고, 중독되며, 파멸해 가는지 상세하게 들려줄 것이다. 여기까지가 책의 1부 〈마약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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