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범 사냥
연해주의 여름. 농장을 둘러싼 회솔나무와 까치박달나무가 남쪽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에 흔들렸다. 범도는 나뭇잎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지나왔을 연화산을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국내 기지였던 연화산의 울창한 여름이 그리웠다.
“이러시지 말라니까 또 이러십니다.”
최의관이 닭똥 치우는 밀대를 짚고 선 그를 타박했다. 최의관은 닭과 돼지를 치는 이 농장의 주인이었다.
“심심해서 그럽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하릴없이 농막에서 길어진 해가 지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농장의 인부들과 어울려 닭똥을 치는 것이 그에게는 한결 편했다.
“범 사냥이나 가시지요.”
그렇게 말한 건 최의관과 함께 온 안이었다. 범 사냥 가자는 말은 안중근이 올 때마다 그에게 하는 인사였다. 안은 그와 함께 산을 타며 사냥하는 걸 즐겼다. 안은 그가 가장 기다리는 방문객이기도 했지만, 농장의 인부들도 그 못지않게 안을 반겼다. 안이 산에서 빈손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범을 손으로 잡을 작정이오?”
그는 안의 빈 어깨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늘 메고 있던 소총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왔지요.”
안중근이 웃으며 저고리 안에서 단총을 꺼냈다. 위로 치켜올라간 안의 콧수염이 눈보다 먼저 웃었다.
“단총으로 범을 잡는다? 예사 범이 아닌 모양이오.”
그는 짚고 섰던 밀대를 옆에 있던 인부에게 건네주며 일렀다.
“다녀올 동안 범이 내려오면 이분에게 올려보내시오.”
범도는 최의관의 농장에 출몰하는 맹수와 너구리들로부터 닭을 지켜주고 밥을 얻어먹는 식객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가 여느 사냥꾼과 다르다는 것은 인부들도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멘 베르단 소총을 바로잡으며 앞장섰다. 총은 그의 일부였다.
‘맛보쟈는 내가 챙겨왔소이다.’
최의관이 고개를 돌려 어깨에 멘 바랑을 돌아보며 안중근의 뒤를 따랐다. 맛보쟈는 연해주의 사냥꾼들이 숲의 정령에게 바치는 술과 안주였다.
안중근이 가지고 온 단총은 38구경 리볼버였다. 미국에 갔던 백무아가 그에게 가져다준 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단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멍청한 포수는 없다. 안은 단총을 익히러 온 것이었다.
농장에서 기다리는 인부들을 위해 그들은 국거리가 될 만한 붉은 사슴 한 마리를 먼저 잡기로 했다. 붉은 사슴은 녹각과 사향의 값은 없어도 체장이 크고 육질이 좋아 인부들이 좋아했다.
범도는 일격으로 체장 육 척에 사십 관은 너끈하게 나가는 붉은사슴을 주저앉혔다. 안중근은 리볼버의 방아쇠를 두 번이나 당겼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단총으로 저격할 거리가 아니었다.
범도가 오기 전까지 연해주 최고의 명사수로 꼽힌 안중근답게 단총도 금방 손에 익혔다. 하지만 열 보를 벗어나면 탄환이 표적을 벗어났다.
“이거 장총에 비할 게 못 됩니다.”
열다섯 보 앞에서 여섯 발 중 세 발을 표적에 집어넣은 안은 고개를 저었다. 총신을 꺾어 회전식 약실에 장전을 마친 안중근은 스무보 앞에서 다시 여섯 발을 쏘았다. 표적은 열 보, 열다섯 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정의 상체 형상이었다. 표적에 들어간 것은 여섯 발 중 단 한 발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는 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리볼버로 이 정도면 대단한 거요.”
회전식 약실이 총열과 분리된 38구경 리볼버는 격발 순간에 총구가 튀어올라 반동을 제어하기 까다로운 총기였다.
“오소리는 몰라도 범을 잡으려면 리볼버로는 어렵소.”
그는 리볼버를 쥔 오른손 위에 얹힌 안중근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가락과 길이가 같은 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옆에 선 최의관의 왼손으로 눈길을 옮겼다. 최의관의 약지도 새끼손가락과 길이가 같았다. 두 사람의 약지는 그들이 동의단지회의 맹원임을 말해주었다. 약지 한 마디씩을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피로 쓴 동의단지회의 맹약을 그는 알고 있었다. 동의단지회가 정한 제1과업은 대한의 원수인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조선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처단이었다. 그들의 제2과업은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박제순, 송병준의 처단이었다.
동의단지회의 맹원들이 왼손 약지를 자른 것은 그것이 열 손가락 중 가장 쓰임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 가장 정결한 손가락이 약지였고, 심장으로 통하는 기혈의 끝이 약지였으니, 그들은 가장 정결한 손가락을 들어 심장에서 뿜어져나온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쓴 것이었다. 제1과업을 삼 년 안에 이루지 못하면 자결로 동포에게 사죄할 것을 태극기에 뿌린 피로 맹세한 그들이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