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그해 우기는 유난히 일찍 시작되었다.
바다는 비안개에 묻히고 목선은 사흘째 포구에 묶여 있었다. 벽에 걸린 라디오에선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물을 손보던 그는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린이 찻주전자를 내올 때까지만 해도 여느 우기와 다르지 않은 한가한 오후였다. 뜨거운 차를 따르던 린의 입에서 다음 순간 나오게 될 말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에 가겠어요.”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딸의 입을 쳐다보았다.
네가 왜?
“전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어때서? 부자는 아니지만 마을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집이 우리야.
“로안이 저의 스물한 살과 같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네 동생, 아니 네가 어때서?
린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는 매일 목선을 끌고 바다로 나갔다. 우기의 바다는 변덕스럽고 거칠었다. 손바닥만한 숙랑이 드문드문 걸려 올라오는 그물은 가벼웠다. 아예 그물 한 번 내리지 않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스콜이 맹렬하게 횡단해가는 바다 위에서 그는 우기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호치민에서 치른 린의 약식 결혼식에도 그는 가지 않았다.
“아빠는 그가 한국 사람이란 거 하나뿐이 모르잖아요?”
그 이상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니?
“단 한 번도, 아빠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묻지 않는군요.”
나이가 많겠지. 신체 어딘가 불편한가? 아니면 정신이? 네가 누구를 남편으로 맞이할지는 너의 권리다. 하지만 그를 내 사위로 받아들이라고 할 권리까지 네게 있는 것은 아니야.
“당신의 마음 알지만, 먼 길을 떠나는 린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린을 보내고 돌아온 아내는 종일 전화기만 바라보며 눈물 바람이었다.
“그 아이는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겠어요.”
두 아들 다음에 얻은 린은 얼마나 예쁘고 총명했던가. 그 아이가 지나가면 마을이 환해졌었다. 이웃의 처녀들이 잇따라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린은 아직 스물한 살일 뿐이에요.”
스물한 살이 어려? 그 나이면 나라를 구할 나이야.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으로 향했다. 액자에 든 흑백사진 아래에는 영웅훈장과 용사증서 두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항불전쟁에 참가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자신의 스물한 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금, 우리 애들이 구해야 할 나라가 있는 세월을 살고 있어요? 당신은 스물한 살이 나라를 구할 나이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불에도 뛰어들 수 있는 나이였던 것에 불과해요.”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아내의 원망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혼란이었다. 그렇게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던 자신의 스물한 살 위로 린의 스물한 살이 중첩되었다. 아내의 원망과 그의 후회 속에 우기가 가고 건기가 왔다. 남은 가족들 모두의 혼란 속에 건기가 가고 다시 우기가 왔다.
그가 린의 남편을 직접 본 것은 두 번의 우기가 더 지나서였다. 린 부부는 첫아이를 안고 왔다. 그는 린을 보고도 반가운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린의 남편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냉랭하던 그의 표정을 풀게 만든 것은 그들의 아이였다.
“메.”
젖을 찾는 아이가 제 어미를 그렇게 불렀을 때 식구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메’ 그 한마디가 가진 다른 의미를 쩌우는 작은딸이 짚어줄 때까지 미처 알지 몰랐다.
“아기가 베트남어로 엄마를 불러.”
메, 그 한마디는 삼십육만오천 번의 호명 끝에 태어나는 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항불전사로 죽은 남편을 묻으며 그에게 말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 왜 엄마 아빠인 줄 아니? 하루에 천 번씩 자신을 불러준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이야. 사람은 누구나 삼십육만오천 번 자신을 불러주어야만 엄마 아빠를 입에 담지만 죽을 때까지 엄마 아빠를 삼십육만오천 번 부를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단다. 너에겐 오늘이 마지막이니 실컷 아빠를 부르렴.
“메.”
어미를 찾으며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는 사내를 쩌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 그는 아이에게 엄마 나라의 말로 엄마라고 불러주었다.
그는 아이를 이모인 로안에게 안겨주며 ‘지’라고 했고, 쩌우의 품에 안겨주며 ‘응와이’라고 일러주었다. 지난 세 해 동안 린이 전화로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덜어지지 않던 걱정을 이제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꼰제.”
사위. 린이 남편에게 쩌우의 말을 옮겼고, 그는 빙긋 웃었다. 그는 그렇게 쩌우의 사위가 되었다. 좀 많은 나이를 제외하면 흠잡을 곳 없는 사람이었다. 장인을 따라 목선을 타고 나가 그물을 함께 당겼다. 포구에선 뱃사람들처럼 서슴없이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의 수영 솜씨는 뱃사람들의 눈마저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저녁을 먹으며 바다에서 군대생활을 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쩌우는 순간 뒷목이 뻐근했다. 그가 해군이었는지, 해병대였는지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해군과 해병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린이 전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위가 전쟁 시기에 그토록 악명 높았던 남조선 해병대가 아니라 해군이었기를 바랐다.
“아버님도 군대생활을 하셨지요. 전쟁에서 공로를 많이 세운 모양입니다.”
사위는 벽에 걸린 훈장과 증서에 눈길을 주었다.
“글쎄, 군대라면 군대지. 훈장은 내 것이 아니고, 그 옆에 있는 용사증서 중에 하나가 내 것이지.”
“그럼 나머지는요?”
사위는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영웅훈장은 아버지의 것이고, 용사증서 한 장은 이 사람의 것이지.”
쩌우는 옆에 앉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내는 그의 무릎을 치며 눈을 흘겼다.
“다 지나간 얘기는 왜 꺼내는 거예요.”
아내는 군대와 전쟁 얘기가 계속되지 않도록 말머리를 아이에게 돌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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