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죽음과 수치 사이에서
번뇌하며 붓을 들다
만약 내가 법에 복종하여 별로 죽음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九牛一毛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사마천이 수치를 견디며 친구에게 보낸 편지
지금으로부터 2,100여 년 전인 기원전 99년 중국 한나라 조정. 황제 앞에 한 신하가 엎드린 채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황제의 진노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노여움이 너무 커서 엎드려 있는 신하를 옹호하다가는 함께 휘말릴 수 있기에 그 누구도 나서서 그 신하를 편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년으로 보이는 그 신하는 감옥에 잡혀 들어갔고 ‘무상죄誣上罪, 없는 사실을 꾸며서 황제를 모독한 죄’의 중벌을 받아 죽음을 목전에 둔 처지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신하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한무제, 홀로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을 벌하다
한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에 이어 기원전 202년 다시 한 번 천하를 통일한 거대 제국이었습니다. 한의 전성기는 제7대 황제인 무제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때 이룩되었습니다. 한무제는 16세 때 황제에 올라 장장 54년 동안 통치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한무제는 우리나라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영토에 행정 구역인 한사군을 설치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한무제는 비단길을 개척한 황제로도 유명합니다. 비단길 개척은 한의 골칫거리인 유목 민족 흉노를 함께 물리치기 위해 장건?~기원전 114을 월지국에 사신으로 보낸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월지국은 흉노의 공격으로 터전을 잃고 나라를 중국 서쪽으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장건은 기원전 138년에 수행원 100여 명과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흉노에 포로로 잡히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옮겨 간 월지국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월지국은 평화롭게 살겠다며 군사 동맹을 거절했지요. 낙담한 장건은 돌아오는 길에 또 흉노에 포로로 붙잡혀 고생하다 죽을 각오로 탈출해 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월지국을 찾아가는 길에 들른 대완국에 피땀을 흘리며 빠르게 달리는 명마가 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대완국은 ‘페르가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란 계통의 유목민이 세운 국가입니다. 한무제는 이 말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광리?~기원전 88를 보내 길을 뚫어 대완국을 쳐서 명마를 잡아오게 했지요. 비단길은 이 과정에서 개척되었습니다.
이광리는 한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였습니다. 한무제는 기원전 99년 이광리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흉노의 우현왕을 치도록 명했습니다. 당시 명장으로 알려진 이릉李陵, ?~기원전 74에게는 별동대를 이끌고 이광리의 뒤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릉은 적은 군사로도 충분히 흉노를 물리칠 수 있다며 무제에게 별동대 5천을 받았습니다. 이릉은 군사 5천 명으로 흉노의 11만 대군과 격돌해 1만여 명의 머리를 베며 용감히 싸웠습니다. 하지만, 화살이 거의 떨어지고 진군을 재촉하는 북까지 찢어지는 등 전투를 계속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이릉은 굴욕을 견디며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마음으로 흉노에 투항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으로 돌아간 군사는 고작 4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흉노는 이릉의 영웅적인 성품을 알아보고 그를 선우흉노의 군주를 일컫는 말의 딸인 공주와 혼인시켜 우교왕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한무제는 이릉이 투항했다는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습니다. 한무제는 이릉의 노모와 처자식을 극형에 처한 후 이릉의 죄를 묻기 위한 어전 회의를 열었습니다. 어전 회의에서 조정 대신들은 눈치만 보면서 한결같이 이릉을 일벌백계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만 했습니다. 그때 무제가 태사령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요.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에 대해 다음처럼 극진히 변호했습니다.
이릉은 5천 명도 안 되는 보병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막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해 억만의 군사를 맞이하여 흉노의 선우와 연이어 10여 일을 싸워, 죽인 적군의 수가 서로 집전한 군사의 수보다 많았습니다.
적군이 사상자를 구하러 오지도 못하자 유목민의 선우가 매우 두려워하여 좌현왕과 우현왕을 모두 부르고, 활 쏘는 자들을 징집하여 전국의 군대가 함께 이릉을 공격하고 포위했습니다. 아군은 천 리 길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다 화살도 다 떨어지고 길도 막히게 되었는데,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사졸들은 죽어 들에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릉이 큰 소리로 군사들을 위로, 격려하자 군사들이 모두 일어나 감격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키며 빈 활을 다시 매,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습니다.
사실 사마천이 이릉을 이렇게 변호한 까닭은, 무제가 이릉이 투항한 것에 깊이 탄식하기에 이를 달래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편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적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 속뜻을 보건대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가 나라에 보답하려 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자께서 저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시고, 제가 이사장군 이광리를 모함하고 이릉을 위해 변호한다고 여기시어 저를 옥사를 맡은 관리에게 넘겨, 절절한 저의 충심을 끝내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자를 속였다고 여겨져 법관의 판결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제는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한 속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진노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광리는 사마천을 이릉과 한패거리라고 모함했습니다. 사실 사마천과 이릉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참으로 억울한 모함이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흉노와 결탁하는 것은 이광리였습니다. 그는 여동생인 이씨 부인이 낳은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에 앉히기 위해 지금의 태자를 제거하려다 들키고 맙니다. 문제는 이광리의 구족을 멸문시키지요. 그러자 이광리는 흉노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이광리보다 먼저 흉노에 투항한 한인 위율의 모략으로 이광리는 흉노의 호록고 선우의 어머니가 낫기를 기원하는 인신공양의 제물로 희생됩니다.
다시 사마천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면, 사마천이 이릉과 사적인 교류가 없었는데도 그를 변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이릉은 함께 궁중에서 일을 했지만, 평소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일찍이 함께 술을 마시며 은근한 정을 나눠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릉의 사람됨을 보건대 비범한 선비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며,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사람과 사귐에 신의가 있고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며 주고받는 데는 의롭고 분별해야 할 일에는 겸양이 있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했습니다. 항상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