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자형사기동대의
원년멤버가 되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착하게 살고 싶었다.
다만 착하게 사는 데도 기술과 맷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돌아보면 경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인터넷이란 건 아예 없었고, TV에도 경찰과 형사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처음 듣고 감동하거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린 파출소 그림을 교과서에서 본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경찰이 된 이유는 단순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경찰은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지키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비 같은 마음으로 경찰이 되었다. 그래도 꿈은 실상을 잘 모른 채 계산 없이 덤벼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느닷없이 계획 없이 그야말로 ‘교통사고’처럼 형사가 되었다. 1991년 9월 서울경찰청 형사부에서 여자형사기동대를 시범 운영하기 위해 희망자를 모집했고, 내가 속해 있던 민원실에서 모집 업무를 맡았다. 여자 경찰관의 수 자체가 적은 시절이다 보니, 상사는 과연 ‘여자 형사’가 성공할 수 있을지 무척이나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퇴근 준비를 하는 내게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아야, 이것이 성공하겠냐?”
아니,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상사는 이미 이 일을 떠맡았고, 그런 상황에서 “시작부터 글러먹은 계획인 것 같은데요” 하고 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상사는 이 일을 끌고 가야 할 사람이니 희망차게 답하는 것이 어린 순경의 모범답안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적당히 둘러댄 답이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였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곧바로 “그래? 아야, 그럼 너도 한번 지원해봐”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 대선배님들이 넘쳐나는 민원실에 갓 배치된 나로서는 상사의 말에 거절이나 망설임의 기색을 드러낼 짬밥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시범 운영 기간 석 달만 어찌저찌 버티면 되겠거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민원실에서 여자형사기동대로 옮겨갔다.
여자형사기동대가 꾸려지자마자 그동안 여자 형사가 없어서 단속하지 못한 사각지대부터 대대적인 홍보성 단속이 밤낮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나는 교통순찰대 출신이라 승합차까지 능수능란하게 운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팀 단속 현장에도 정신없이 불려다녔다.
새 나라의 어린이 같던 내 잠버릇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자는 새우잠은 기본이고, 의자에 꼿꼿하게 앉은 채로 오 분간 선잠을 자는 데도 익숙해졌다. 쪽잠 자는 법부터 형사의 기술을 체득해나간 시간이었다. 열심히 성실히 하겠다는 굳은 의지로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국가대표급 체력을 지닌 운동선수 출신 선배마저도 보약을 먹어가면서 버텼던 일이 새삼스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형사로서 첫 단속을 나간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여성 전용 사우나에서 고액의 판돈을 걸고 도박하는 현장이었다. 벗은 몸의 여자들이 간간이 거친 입담으로 욕지거리하면서 화투장을 내리치는 찰진 소리가 사우나에 울려퍼졌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그 마음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도박의 종류와 판돈의 규모부터 파악해야 했다. 그때는 여형사는 물론 여경도 드문 시절이라, 사우나가 여성 도박꾼들이 마음 놓고 판 벌이기 딱 좋은 장소였다. 112 신고가 들어가도 여성 전용 공간에 남자 경찰관이 들어갈 수가 없고, 사전 조율 없이는 내밀한 장소에 마구 진입할 수 없다보니 출동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곤 했다. 그 와중에 도박판 운영자들은 순식간에 현장을 정리하고 모른 체하기 일쑤였다.
내 책임은 막중했다. 빠른 시간 안에 도박판의 선수와 구경꾼을 구별하고, 속칭 ‘하우스장’이라 불리는 도박판 주최자도 색출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을 덮치자 그저 아비규환이었다. 알몸의 여자들이 외마디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정신없이 사방팔방 도망쳤고, 내 정신도 혼비백산이 되고 말았다.
가장 위험천만했던 일은 한증막 안으로 뛰어들어간 아주머니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평소 목욕탕의 열기도 힘들어했던지라 절절 끓는 한증막에 발을 디딘 순간, 숨통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다 벗은 몸들 사이에서 도망친 여자 한 명을 콕 집어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찾았다 싶으면 붙들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피하는데, 저러다가 한증막 벽에 부딪혀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떡하나 무섭고 주저되고 조심스러웠다. 이런 일도 형사의 직무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그 불구덩이에서 다 벗은 여인을 안전하게 체포해서 끌어내야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 아수라장,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땀범벅이 된 나는 비로소 내가 완전히 딴 세상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게 단속을 마무리하고 25인승 버스에서 체포된 인원수를 확인했다. 운전하는 경찰에게 ‘출발’ 신호를 외치고는 그제야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웃었던 모양이다. 방금 내 손으로 잡은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조금 전 그 형사 맞아요? 이렇게 어린 형사님이셨어요? 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처음 마주하는 상황 앞에서 나 또한 놀람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는지 나도 모르게 화난 표정, 성난 표정이 배어나왔나보다. 나도 무서웠는데, 당신도 무서웠구나.
조사하는 동안에도 감정은 요동쳤다. 도박판에서 실랑이한 여성이 푸근한 이웃집 아주머님처럼 보였다가, 끊임없이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할 때는 영락없는 사기꾼처럼 보였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도 내 시선과 마음의 흐름에 따라 같은 사람이 선량한 이웃으로 보였다가 비열한 범죄자로 비칠 수도 있다는 선득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형사는 힘만이 아니라 범인에게 지지 않을 기세는 물론, 현장 상황과 변수를 관통하는 시선과 순발력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때 나는 사회가 어떤 곳인지 몰랐고, 어른들의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험한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상상해본 적 없는 낯설고 위험 서린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도 없는 때였다. 부모님의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살던 내가 이런 거친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밤잠 못 자고 사회의 어둠을 쫓은 지 석 달 안에 나는 이 세상의 밑바닥을, 적나라한 민낯을 마주하고 있었다.
형사가 목격하고 감당해야 하는 세상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끊임없이 봐야 하는,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형사는 그 어두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신경과 기운을 범인에게 집중시키고, 현장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끌고 가는 힘이 형사의 능력이었다. 호출이 오면 자다가도 뛰쳐나가고, 중요한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며칠이고 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습관이 쌓이고 쌓여서 이골 난 것이 형사의 체력이었다.
형사의 체력이란 결코 신체적 능력이 전부가 아니다. 형사의 진짜 체력은 ‘이골’이었다. 우리는 밤 12시에 퇴근했다가도 새벽 2시에 나오라면 뛰어나와야 했다. 큰 사건이라도 터지면 그 상태로 하루이틀, 때론 한 달 두 달도 간다. 그런 식으로 잠 못 자는 생활이 계속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찰나의 실수와 방심에 범인을 놓칠 수도 있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형사는 그 팽팽한 긴장감을 범인 검거의 그날까지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몸에 푹 배어 있어야 한다. 이골이 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다는 건 그런 뜻이다. 이것이 내가 배운 진짜 형사의 힘이었다.
그렇게 유효기간 석 달짜리 형사가 될 거라 생각했던 나는 꼬박 30년 동안 형사로 살았다. 현장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쉽게 헤아릴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마음과 표정을 보았다. 그 끔찍하고도 서글픈 마음들 속에서 헤매고 당황하고 깨지면서도 떠나지 못했다. 형사가 내 밥벌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곧 사람의 일이었고 결국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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