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지구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방에 있는 코끼리를 상상해보라. 이 코끼리는 우화에 나오는 체중 측정 대상이 아니라, 실제 몸무게가 알려진 포유동물이다. 방이 그것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넓다고 상상하라. 이를테면 학교 체육관이라고 하자. 이제 생쥐가 허둥지둥 들어온다고 상상하라. 그 옆에서 유럽울새가 깡충깡충 뛴다. 대들보에는 올빼미가 앉아 있다. 천장에는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방울뱀이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거미가 한구석에 거미줄을 쳐놓고 있다. 모기가 허공을 가르며 윙윙거린다. 화분에 심은 해바라기 위에 뒤영벌이 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가상의 공간 한가운데에 인간을 추가하라. 그녀를 리베카라고 부르자. 그녀는 시력이 좋고 호기심이 많으며 (다행히도) 동물을 좋아한다. 그녀가 어쩌다 이런 난장판에 빠졌는지 걱정하지 마라. 이 모든 동물들이 체육관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도 신경 쓰지 마라. 그 대신 리베카와 이 상상 속의 나머지 동물들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할지 생각해보라.
코끼리는 잠망경처럼 코를 들어올리고, 방울뱀은 혀를 날름거리고, 모기는 더듬이로 허공을 가르고 있다. 세 동물은 모두 주변 공간의 냄새를 맡으며 떠다니는 향기를 받아들인다. 코끼리는 이렇다 할 냄새를 맡지 않는다. 방울뱀은 생쥐의 궤적을 감지하고, 몸을 칭칭 감은 채 매복한다. 모기는 리베카의 숨결에 포함된 매혹적인 이산화탄소 냄새와 그녀의 피부 향내를 맡는다. 녀석은 그녀의 팔에 내려앉아 식사할 준비를 하지만, 침으로 찌르기도 전에 그녀의 손찌검을 피해 날아간다. 손바닥의 찰싹 소리는 생쥐를 불안하게 만든다. 생쥐는 경각심을 갖고 찍찍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는 박쥐에게는 들리지만 음높이가 너무 높아 코끼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편 코끼리는 생쥐나 박쥐의 귀가 듣기에는 너무 낮지만 방울뱀의 ‘진동에 민감한 배’에서는 느껴지는 깊고 우렁찬 소리를 낸다. 생쥐의 초음파 찍찍 소리와 코끼리의 초저주파 울음소리를 모두 인지하지 못하는 리베카는, 그 대신 자신의 귀에 더 잘 맞는 주파수로 노래하는 울새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녀의 청각은 너무 둔해서, 새가 곡조 내에서 표현하는 모든 복잡성을 분간할 수 없다.
울새의 가슴은 리베카에게는 빨갛게 보이지만, 파란색과 노란색 색조로 국한된 코끼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뒤영벌도 빨간색을 볼 수 없지만, 무지개의 반대편 끝 너머에 있는 자외선 색조에는 민감하다. 벌이 앉아 있는 해바라기의 한가운데에는 새와 벌 모두의 관심을 끄는 자외선 과녁이 있다. 해바라기 꽃이 노란색 일색이라고 생각하는 리베카에게는 그 과녁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은 방 안에서 가장 날카로워, 코끼리나 벌과 달리 거미줄 위에 앉아 있는 작은 거미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방의 불이 꺼지자마자 그녀의 시야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이 모든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참가자들을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거미는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한다. 거미의 세계는 거의 전적으로 거미줄―거미가 스스로 만든 덫으로, 확장된 감각으로 작용한다―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에 의해 정의된다. 길 잃은 모기가 거미줄에 걸려들자, 거미는 몸부림치는 먹이의 숨길 수 없는 진동을 감지하고 살육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공격하는 동안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고주파 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발사한 생물―박쥐―에게 튕겨 보낸다. 박쥐의 음파 탐지기는 매우 예리해서, 어둠 속에서도 거미를 찾을 뿐만 아니라 거미줄에서 거미를 콕 집어낼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찾아낸다.
박쥐가 먹이를 먹는 동안, 유럽울새는 대부분의 다른 동물이 느낄 수 없는 친숙한 끌림을 느낀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어, 바야흐로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이주해야 할 때다. 밀폐된 체육관 안에서도 울새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낄 수 있고, 내부 나침반의 안내에 따라 정남향을 바라보며 창을 통해 탈출한다. 울새가 떠난 체육관에는 코끼리 한 마리, 박쥐 한 마리, 뒤영벌 한 마리, 방울뱀 한 마리, 약간 당황한 올빼미 한 마리, 억세게 운 좋은 생쥐 한 마리, 그리고 리베카라는 여성 한 명이 남는다. 이 일곱 생물은 동일한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지만, 야성적이고 놀랍도록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 지구에 있는 수십억 종의 상이한 동물과 그 종 내의 수많은 개체들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구는 광경과 질감, 소리와 진동, 냄새와 맛, 전기장과 자기장을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은 현실의 충만함의 극히 일부만을 향유할 수 있다. 각각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 거품sensory bubble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광대무변한 세계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하다.
각자의 환경세계
감각 거품을 의미하는 멋진 단어인 환경세계Umwelt가 있다. 이것은 1909년 발트해 연안 독일의 동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이 정의하고 대중화한 개념이다. 환경세계는 ‘환경’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에서 유래했지만, 윅스퀼은 그것을 단순히 동물의 주변 환경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환경세계는 특히 동물이 감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의 일부인 지각적 세계perceptual world를 의미한다. 방금 언급한 ‘상상의 방’의 거주자들처럼, 수많은 생물이 동일한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환경세계를 가질 수 있다. 포유류의 피를 탐하는 진드기는 동물의 체온, 털의 감촉, 피부에서 방출되는 부티르산 냄새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 가지가 진드기의 환경세계를 구성한다. 진드기의 입장에서 볼 때 푸른 나무, 붉은 장미,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등은 멋진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드기가 그것들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을 감지할 수 없고,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윅스퀼은 동물의 몸을 집에 비유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집마다 정원으로 열리는 창문이 여러 개 있다. 빛의 창문, 소리의 창문, 냄새의 창문, 맛의 창문, 수많은 촉감의 창문이 있다. 이 창문들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집에서 바라보는 정원이 달라진다. 정원은 결코 ‘더 큰 세계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원은 집에 속한 유일한 세계―환경세계―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정원은 집의 거주자들에게 나타나는 정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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