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닌*
*엄마는 시가 사람들을 호칭할 때 주로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처럼 딸인 나의 입장을 기준으로 말했다. 반면 친정 사람들의 호칭은 대부분 엄마와의 관계 그대로 사용했다. 이 차이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호칭의 형식을 통일하지 않고 엄마가 표현한 대로 썼다.
나는 평범했어. 보통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남 앞에서 내가 뭘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싫더라고. 어느 겨울에 큰오빠가 스케이트를 사줬어. 강이 꽁꽁 얼어있었지만, 어린아이에게 강은 위험하니까 읍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시골에 데려갔어. 겨울이 되면 논도 얼거든. 논바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데 계속 비틀거리고 넘어지는 거야. 당연하잖아, 처음이니까.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를 구경했어. 1960년대 시골이니까 스케이트가 얼마나 신기한 물건이겠니. 넘어지는 것도, 넘어지는 나를 아이들이 쳐다보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어. 자빠지고 발버둥 치고 엉덩방아를 찧어가면서 배워야 하는데 망신당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야. 그다음부터 스케이트를 안 탔어. 자전거도 마찬가지야. 작은언니는 어릴 때 오빠에게 자전거를 배워서 지금도 잘 타고 다녀. 시장도 가고 손주에게도 가고 친구 집에도 가고.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라. 비틀거리고 넘어지는 게 싫어서 한 번 타고 그만뒀어.
길거리 음식도 안 먹었어. 친구들이 아이스케키를 먹자고 해도 걸어 다니면서 뭘 먹는 게 창피해서 싫다고 했어. 아이들이 풀빵을 먹으면 혼자 집에 갔어, 길거리에 서서 먹는 게 스스로 용납이 안 돼서. 달고나를 경상도 사투리로 ‘포또’라고 하는데, 포또도 해본 적이 없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걸 하는 게 부끄럽더라고. 어떤 아이들은 나를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안 그래. 누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나 어묵 먹자고 하면 같이 먹어. 나 혼자 그런 걸 먹지 않지만.
학교 다닐 때는 문학과 역사를 좋아했어. 그런데 사실은 음악을 더 좋아하고 싶었어. ‘좋아했던’ 게 아니라 ‘좋아하고 싶었어’. 내가 음치잖아. 재능이 없으니까 좋아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못 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좋아할 수조차 없는 거야. 그렇게 스케이트도 자전거도 못 배우고 노래도 악기도 못 배웠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차근차근 배우면서 잘하는 거지. 배움의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서투름을 감당하지 않은 대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거야. 어리석고 어리석지.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점촌’이라는 마을이야. 예전에는 광산촌으로 유명했고 우리 아버지도 광산업을 하셨어. 일제강점기에 부모님이 결혼했을 때 아버지는 열네 살, 엄마는 열일곱 살이었어. 열네 살이라니, 완전히 꼬마 신랑이잖아. 아버지는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어. 엄마 혼자 시집살이하면서 시부모님 봉양하고 시동생, 시누이 키우고 온갖 집안일을 다 했지. 고작 10대, 20대밖에 안 된 나이에. 특별한 사연도 아니야. 그 시대 여자들은 다 그랬으니까. 몇 년이 지나도 아버지가 일본에서 안 돌아오니까 집안 어르신들이 자전거를 사준다고 꼬드겼대. 그 당시에 자전거는 신문물이지. 아버지는 자전거를 가지러 한국에 왔다가 그길로 붙잡혀서 눌러앉았고, 엄마는 결혼한 지 10년 만에 큰언니를 낳았어. 내가 2남 3녀 중 막내니까 나 어릴 때 엄마는 이미 나이가 많았지. 그래봐야 40대, 지금 네 나이쯤이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산 건 열 살까지가 전부야. 초등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로 유학 갔거든. 엄마에 대해 떠오르는 게 별로 없어.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를 뿐 아니라 엄마로서 어땠는지도 생각이 안 나.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맏며느리로서 여러 사람을 먹이려고 일했다는 것. 아버지 고향이 점촌에서 가까운데 그 동네가 집성촌이거든. 이웃들이 일가친척이야. 오일장이 서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어. 읍내에 살았던 데다 집이 넓고 형편이 넉넉한 편이어서. 장날이면 방마다 사람이 가득 찼어, 식당처럼. 엄마는 항상 그 많은 손님을 먹이고 대접했어. 엄마도 나름대로 자신들에게 신경을 썼겠지만, 내가 본 엄마는 나의 엄마라기보다 동네의 공공재 같은 사람이었어. 그런 기억만 남아있어.
대구로 유학 간 이유는 내가 어릴 때부터 갑상선 질환을 앓았거든. 평생 지병이 되었지. 한 달에 한 번씩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점촌에서 오가느니 대구에서 지내기로 하고 대학생이던 큰언니, 고등학생이던 작은 오빠와 자취했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으니 학업도, 진로도 내 의사대로 선택하고 결정했지. 누구와 상의하는 일도 없었고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큰언니가 보호자였던 셈인데 언니는 형부랑 연애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지.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도 공부는 곧잘 했어. 내가 고지식하잖아.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했어.
문학과 역사 성적이 특히 좋았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교생의 국어 점수를 그래프로 만든 성적표가 나왔는데 한 학생만 그래프 선이 끝까지 올라가 있더라고. 그게 나였어. 마흔 중반에 동기 몇 명과 당시 국어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선생님이 나를 보고 반색하면서 물었어. “뭐 하고 사니?” 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이 어려울 때였어. 나는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었는데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살림해요.”라고 대답했어. 선생님이 의아해하더라. “뜻밖이네. 너는 자의식이 강해서 네 이름으로 뭔가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약간 씁쓸했어. 예전에는 나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있었는데 싶어서. 하지만 그런 생각도 지나가는 거지, 먹고살기 바빠서 금세 잊었어.
학창 시절의 나를 알던 사람은 모범생으로 기억할 거야. 실제로 선생님에게 ‘얌전하다’, ‘조신하다’, ‘착하다’, ‘성실하다’ 같은 말을 듣는 학생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에 의문이 들긴 해. 얌전하고 조신한 게 미덕일까? 착하다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닌 남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성실은 언제나 좋은 걸까? 나는 칭찬받는 학생이 되려고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믿어버렸던 것 같아.
나는 전교에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이었어. 텅 빈 교실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서늘한 아침 바람을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더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주임 선생님이 지각생을 교문 앞에 일렬로 세워놓았거든. 쓸데없는 자존심이겠지만 그게 너무 굴욕적으로 느껴져서 가장 먼저 등교하는 학생이 되기로 했어. 나도 늦잠을 자는 날이 있고 졸다가 정류장을 지나칠 때도 있을 테잖아.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완전히 늦어버렸어. 첫 수업이 시작하고 교문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2교시가 시작하기 전 교실에 앉아있는 거야. 교문 앞에 서 있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수업을 포기하는 게 내가 택한 방식이었지.
모범생이라 불렸지만 내 안에 강한 자의식과 자유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책과 영화를 좋아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 그게 좋아서 책과 영화에 몰두했던 건지도……. 괴테,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솔제니친 같은 사람들의 세계문학도 읽고 박경리, 조정래 같은 사람들의 한국 문학도 읽었어. 문학만 좋아한 건 아니고 무협지와 만화책도 무지하게 읽었어. 책은 다 재미있더라고.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