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1897
/ 안톤 체호프
한 번에 한 장씩
〈마차에서〉에 관한 생각
오래전, 일련의 고통스러운 편집을 견디며 약간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 있던 나는 당시 〈뉴요커〉의 소설 편집자 빌 버포드Bill Buford와 통화하다가 칭찬을 한마디 듣고 싶어 낚시를 던졌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빌의 마음에 드는 게 뭡니까?” 나는 징징거렸다. 상대방은 한참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빌은 이런 말을 했다. “음, 한 줄을 읽습니다. 그러면 그게 마음에 들어요… 다음 줄을 읽어볼 만큼.”
그거였다. 그게 빌의, 그리고 아마도 〈뉴요커〉의 단편 미학 전부였다. 그것으로 완벽했다. 이야기란 선형적-시간적 현상이다. 이야기는 한 번에 한 줄씩 진행되면서 우리를 매혹시킨다또는 매혹시키지 못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뭔가 해주려면 우리는 그 안으로 계속 끌려 들어가야만 한다.
나는 이 생각에서 오랫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다. 소설을 쓰는 데 큰 이론은 필요 없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합리적 인간이 네 번째 줄을 읽다가 다섯 번째 줄로 넘어갈 만큼 마음이 흔들릴 것인가?
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계속 읽어나갈까?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왜 그러고 싶을까?
그게 100만 달러짜리 질문이다. 무엇이 독자를 계속 읽게 할까?
물리학에 법칙이 있듯이 소설에도 법칙이 있을까? 어떤 게 그냥 다른 것보다 잘먹히는 걸까?
무엇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유대를 형성하고 무엇이 깰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한 줄에서 다음 줄로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이다.
(중략)
*
〈마차에서〉
그들은 아침 8시 반에 읍내에서 마차를 몰고 나왔다.
포장도로는 말랐고 찬란한 4월의 태양이 온기를 뿌렸지만 도랑과 숲에는 여전히 눈이 있었다. 겨울, 악하고 어둡고 긴 겨울은 바로 얼마 전에야 끝났고 갑자기 봄이 왔지만, 온기도, 봄의 숨에 따뜻해진 나른하고 투명한 숲도, 호수처럼 물이 고인 들판의 거대한 웅덩이들 위를 나는 검은 새 떼도, 다른 사람이라면 너무 좋아 뛰어들 것만 같은 이 경이롭고 가없이 깊은 하늘도, 마차에 앉은 마리야 바실리예브나에게는 전혀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그녀는 학교에서 13년을 가르쳤고 그 세월 내내 급여를 받으러 수도 없이 읍내에 다녀왔다. 지금 같은 봄이건 비 오는 가을 저녁이건 겨울이건 그녀가 늘 변함없이 갈망하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목적지에 닿는 것뿐이었다.
이 지역에서 오래, 아주 오랫동안, 100년 동안 살아온 것 같았고 읍내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의 모든 돌멩이, 모든 나무를 아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그녀의 과거와 그녀의 현재가 있었으며, 그녀는 학교, 읍내까지 왕복하는 길, 다시 학교, 다시 길 외에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
이제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가 아니다.
당신 마음 상태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우리가 교실에 함께 앉아 있다면, 실제로 그러면 좋겠는데, 당신은 나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당신에게 잠시 가만히 앉아서 두 마음 상태를 비교해 보라고 요구하겠다. 읽기 전의 텅 빈, 수용적인 마음 상태와 지금 당신의 마음 상태.
천천히 다음 질문에 대답하라.
1. 책장에서 눈을 들고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을 요약하라. 한두 문장으로 해보라.
2. 무엇에 호기심을 느끼는가?
3. 이야기가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대답을 하든 이제 체호프는 그 대답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첫 부분에서 이미 어떤 예상과 질문이 일어나게 했다. 나머지 이야기가 이것에 응답할수록또는 ‘이것을 고려할수록’ 또는 ‘이것을 활용할수록’ 당신은 이야기가 의미 있고 일관성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야기의 첫 맥박이 뛸 때 작가는 볼링 핀들을 공중에 던지는 저글러와 같다. 나머지 이야기는 그 핀을 잡는 것이다.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든 어떤 핀들은 저 위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느끼는 게 좋다. 아니면 그 이야기는 의미를 만들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전체에 걸쳐 이야기가 가는 길이 좁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읽기 전에는 가능성이 무한했지만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든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약간 뭔가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에게는 이게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지금까지는?
어떤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서 만들어내는 호기심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호기심은 관심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가, 지금까지는?
마리야다.
자, 그 관심의 특징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또 어디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첫 줄에서 우리는 확인되지 않은 “그들”이 이른 아침 어느 읍내에서 마차를 몰고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포장도로는 말랐고 찬란한 4월의 태양이 온기를 뿌렸지만 도랑과 숲에는 여전히 눈이 있었다. 겨울, 악하고 어둡고 긴 겨울은 바로 얼마 전에야 끝났고 갑자기 봄이 왔지만, 온기도, 봄의 숨에 따뜻해진 나른하고 투명한 숲도, 호수처럼 물이 고인 들판의 거대한 웅덩이들 위를 나는 검은 새 떼도….”
나는 위에서 두 번 나타나는 ‘~지만’에 진하게 표시해 놓았다. 우리가 똑같은 패턴, 즉 ‘행복의 조건은 존재하지만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패턴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날씨는 화창하지만 아직 땅에는 눈이 있다. 겨울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새롭거나 흥미로울 것은 없다…. 우리는 이 긴 러시아의 겨울이 끝나는 데서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듣고 싶어 기다리게 된다.
이야기에 사람이 등장하기 전에도 서술하는 목소리의 두 요소 사이에는 긴장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상황이 멋지다고 말해주고하늘은 “경이롭고 가없이 깊”다 다른 하나는 이런 일반적인 멋진 것에 저항한다. (만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면 이미 다른 느낌을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포장도로는 말랐고 찬란한 4월의 태양이 온기를 뿌렸다. 도랑과 숲에는 여전히 눈이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겨울, 악하고 어둡고 긴 겨울은 바로 얼마 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단 중간쯤 가면 우리는 서술하는 목소리에 담긴 저항적인 요소가 마리야 바실리예브나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녀는 봄에 전혀 감동을 받지 않은 채로 그녀의 이름과 함께 마차에 나타난다.
체호프는 이 마차에 집어넣을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 봄의 마력에 저항하는 불행한 한 여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행복한 여자예를 들어 막 약혼했거나, 막 건강 증명서를 받아 들었거나, 아니면 그냥 행복하게 타고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겠지만 체호프는 마리야를 불행하게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런 다음 그녀를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방식으로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13년을 가르쳤다. 읍내까지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녀서 지겹다. “이 지역”에 100년 동안 산 느낌이다. 가는 길의 모든 돌멩이, 모든 나무를 아는 느낌이다. 최악으로 다른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사랑에 거부를 당했기 때문에, 또는 막 죽을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불행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체호프는 마리야를 삶의 단조로움 때문에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야기의 안개로부터 특정한 여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금 읽은 세 문단이 구체성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른바 성격 묘사는 바로 그렇게 구체성이 늘어난 결과다. 작가는 묻는다. “그런데 이 특정한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길을 좁히는 효과를 내는 일련의 사실들로 답한다. 어떤 가능성은 배제하고 어떤 가능성은 앞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
특정한 인물이 만들어지면서 우리가 ‘플롯’이라고 부르는 것의 잠재력도 커진다하지만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의미 있는 사건’으로 대체해 보자.
특정한 인물이 만들어지면서 ‘의미 있는 사건’의 잠재력도 커진다.
“옛날에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다”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웅덩이, 강, 바다, 폭포, 욕조, 쓰나미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 인물이 “나는 평생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사자가 걸어 들어와도 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어떤 인물이 늘 창피를 당할까 봐 걱정하며 산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한다. 오직 돈만 사랑하거나 한 번도 우정이란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거나 인생이 너무 지겨워 다른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아무것도 없을 때이야기를 읽기 시작하기 전는 일어나고 싶은 사건도 없었다.
이제 마리야가 여기 있고, 그녀가 행복하지 않으니 이야기가 들썩거린다.
이야기는 그녀에 관해 말한다. “그녀는 불행하며 다른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자, 이제 그 점을 살펴볼 것이다”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신은 우리가 여기에 멈추어서 비합리적인 양의 시간을 소비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이 짧은 단편 소설 첫머리 끝에서 흥미로운 장소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이야기의 관심사가 급격히 좁혀졌다. 이야기의 나머지는 이제 틀림없이 그 관심사를 다루고이용하고, 활용하고 다른 관심사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작가라면 다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당신은 다른 무엇을 알고 싶은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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