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존
살아남기 위한 호모 사피엔스의 전략
사랑과 연민은 사치가 아닌 필수다.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
― 달라이 라마
이 세상에 다른 사람만큼 성가신 것도 없다.
― 관계 치료사, 스탠 탓킨Stan Tatkin
사랑은 생존이다. 애타게 사랑하는 상대방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콱 죽고 말겠다고 단언하는 사춘기의 그런 절박함과는 다른 문제다.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생존은 진짜 근본적인 의미, 즉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가’가 달려 있는 그 생존이다. 인간은 참 까다로운 동물이다. 우리는 엄청나게 큰 뇌를 가진 덕분에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탐험하고, 정복하고, 혁신을 일으킬 수 있지만 번식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효과적으로 해내지 못한다. 친구, 부모님,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지혜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검색엔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을 배우지도 못한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아주 가까운 관계부터 스쳐 지나가는 관계까지, 모든 관계의 기본은 협력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협력을 잘하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너무나 방대하고 네트워크를 이루는 구성원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또한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와 관계가 얽혀 있다. 사랑은 협력에서 비롯되고, 협력은 인간의 생존 수단이다. 오늘날 인간이 하는 사랑을 이해하려면 사랑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협력부터 알아야 한다. 협력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요소가 된 이유, 그리고 때때로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이유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어쩌다 부모가 되고 보니
나는 청소년기에 아기나 어린아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우연히 아기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털이 복슬복슬하고 발이 여러 개 달린 작은 동물들을 보면 나도 그런 반응이 나왔다. 어릴 때 다양한 동물을 키워보긴 했지만 처음으로 어린 동물을 제대로 돌본 건 영장류 동물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던 시절, 런던 동물원에서 연구를 할 때였다. 당시 나는 검정짧은꼬리원숭이 무리의 먹이 찾기 행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길 찾기 능력이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에 관한 유명한 논쟁의 진화론적 기원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말을 일삼는 코미디언들의 단골 개그 소재이기도 하다. 이마 위로 털이 높이 자란 모습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원숭이 무리는 싸우고, 화해하고, 권력을 위해 타협하며 매일 드라마틱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예비 엄마 원숭이는 새끼를 낳는 일에 몰두했다. 나는 원숭이들에게 여러 조건을 세심하게 통제한 과제를 던져놓고 반응을 살펴보는 것보다 이런 일상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엄마가 된 원숭이들은 대체로 엄마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로 밤 시간에 혼자서 새끼를 낳았고, 갓 태어난 새끼를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돌보기 시작했다. 무리에 새 구성원이 생기면 처음에는 다들 환영했다. 모두가 다가가서 안아주거나 털을 손질해주기도 하고, 가끔 어린 암컷 원숭이가 조그마한 새끼를 몰래 살짝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를 돌보는 일은 거의 전적으로 엄마 원숭이가 도맡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검정짧은꼬리원숭이 새끼도 무리가 살고 있는 공간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탐색하면서 단시간에 독립성을 키웠다. 태어나 몇 주만 지나면 다른 어린 원숭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엄마 원숭이는 어린 원숭이가 신나게 노느라 녹초가 될 쯤에야 먹이를 갖고 돌아오거나 다른 곳으로 새끼를 데려갔다.
그런데 우리가 관찰하던 원숭이 중에 새끼 기르는 일을 잘해내지 못하는 미아라는 원숭이가 있었다. 처음 낳은 새끼 한 마리를 방치했다가 잃은 경험이 있는 미아는 사육사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두 번째 새끼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똑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었다. 미아는 새로 태어난 새끼를 돌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직접 낳지 않은 새끼를 대신 돌봐주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육사들이 개입해서 미아의 새끼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커다란 눈망울에 조그맣나 손가락을 가진 이 털 많은 새끼 원숭이를 처음으로 돌보고 키웠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새끼 원숭이는 우리가 아침에 차를 마시는 동안 사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구멍마다 들어가 보고 탐색하면서 놀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내 첫아이가 태어났다. 책이란 책은 전부 섭렵하고 수업까지 들은 후 나는 육아 지식으로 똘똘 뭉친 엄마가 되었지만, ‘진짜’ 엄마가 되는 건 새끼 원숭이를 돌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낳은 아기는 믿기 힘들 정도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눈은 무엇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팔과 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먹고, 트림하고, 잠드는 건 물론이고 기분이 좋아지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했다. 나처럼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 가장 힘든 건 아이가 배변을 하면 전부 닦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생후 4주가 될 때까지는 머리도 가누지 못하고, 16주가 되기 전까지는 손에 쥔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4주가 될 때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옹알거리고, 혼자 앉는 건 생후 32주가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자 마침내 주변을 기어 다니면서 놀고, 두 살이 되자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아이가 아동기를 지나 청소년기를 살아가는 동안 가족과 친구, 선생님과 병원 의료진을 비롯한 한 무리의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지식, 의료진의 보호, 또래 친구들에게 받는 도움과 도전 과제, 가족의 보살핌이라는 혜택을 받으면서 말이다. 이런 도움이 없으면 아이는 잘 사는 건 고사하고 생존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인간의 해부학적인 특징
저에게는 다른 엄마들이 정말 중요한 친구예요. 다들 30대 중반이고, 인생의 같은 단계를 보내고 있죠.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관심사가 같아요. “요즘 우리 애가 밥을 안 먹어”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위로가 돼요. ― 조앤
새끼 원숭이와 달리 사람의 아기를 키우는 데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진화적인 특징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원래 태어나야 하는 시기보다 훨씬 더 일찍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의 뇌 크기와 걷는 방식이 남다른 독특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비슷한 몸집의 포유동물보다 뇌가 여섯 배는 크고 두 발로 걷는 인간의 아기는 머리가 적정 시기까지 자란 다음에 태어나게 되면 비좁은 산도를 통과하기 어렵다. 그 상태로 낳다가는 엄마와 아기가 둘 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생물종이 끊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인간은 훨씬 더 일찍 태어나도록 진화했다. 그 결과 아기는 뇌가 완전히 발달하기 전에 세상에 태어나고, 따라서 출생 후 상당 기간 동안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엄마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갓난아기와 말 안 듣는 유아를 키우느라 씨름해야 한다. 검정짧은꼬리 원숭이 새끼는 사람의 아기보다 더 많이 발달된 상태로 태어나므로 엄마 원숭이가 적극적으로 돌봐야 하는 새끼도 한 마리뿐이다. 즉 새끼가 돌봐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 자란 후에 다른 새끼를 낳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녹초가 된 많은 부모들이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간의 아기는 태어나 수년 동안 돌봐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내 아이들도 이제 1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 계속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 나는 마흔다섯 살인데도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내가 걱정되고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주장하시곤 한다. 여기에다 인간의 능력으로 기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달하고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이가 성인으로 살아남아 잘 살기 위해서는 아이를 보살펴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여성의 힘
처음에는 인간도 다루기 힘든 어린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같은 여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선배 엄마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물을 구하는 방법을 비롯해 아기를 키우는 핵심 기술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청소년기인간의 독특한 생애 단계에 들어서면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이 사냥이나 불 피우기 등 최신 기술을 전수해주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세세하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협력은 곧 미로처럼 뒤얽힌 정치적 관계다. 다른 대부분의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아이 아빠는 이러한 관계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50만 년쯤 전에 인간의 뇌가 더 커지고 갓 태어난 아기의 의존성이 더욱 높아진 데다 발달 기간이 더 길어지자 아이의 엄마와 이모, 언니들의 도움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아이 아버지가 힘을 보태도록 진화했고, 우리는 진화적 종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다른 저서 《아버지의 생애The Life of Dad》를 참고하기 바란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