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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의 시간이 황선호에게 주어졌다. 정확히 5개월 19일. “짧지는 않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을 거야. 정확히 말하면 5개월 하고 29일이 남았네.” 열흘 전, 인구가 300만에 육박하는 광역시의 수장은 그렇게 말하며 황선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300만은 알바니아나 몽골국의 전체 인구와 비슷한 숫자이다. 물론 이보다 인구가 적은 나라도 많을 것이다. 이 광역시가 작지 않은 도시라는 뜻이고, 그만큼 시장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광역시 시장 출신 정치인 가운데 여러 명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물론 대통령이 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도시의 시장이 대권 후보로 가는 유력한 코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황선호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시장의 손길이 느껴져 몸을 웅크리곤 한다.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해 와 있는데도 그렇다. 열흘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 어떤 일을 하기에는 길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짧다. 그러나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모든 것이 낯선 공간으로 이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보는 그가 살아온 인구 300만의 광역시보다 면적이 세 배쯤 크고 인구는 두 배쯤 적은 도시국가다. 공식명칭은 보보민주공화국. 유럽 대륙의 여러 큰 나라들이 이 땅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국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최근까지 쿠데타를 통한 권력 주체의 변동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나라이다. 보보는 나라 이름이기도 하고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보보시는 보보민주공화국의 수도이고, 행정구역상 하나밖에 없는 도시이다. 보보민주공화국의 국민은 모두 보보시의 시민이다. 황선호는 최소한 이 도시에서 6개월, 시장의 정확한 계산대로라면 5개월 19일 이상 살아야 한다. 그 기간은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많이 늘어날지 모른다. 황선호는 그런 예감이 싹트면 애써 누른다. 그러나 누른다고 눌러진다면 그게 예감이겠는가. 황선호는 되도록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일 자기가 어떤 사람일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상상은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허전한 일이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아무 권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선호는 다만 오늘을 사는 사람이려고 한다.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내려 한다. 그러다 보면 그날에 도달할 것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할 때 그의 마음에 웅크린 생각이 그것이었다.
황선호는 현재의 자기 상태를 텅 빈 자루에 비유한다. 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그의 자루는 완전히 비었다. 그가 있던 광역시에서는 필요해서 채웠던 것들이 이 도시에서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이어서 비워야 했다. 그 광역시에서 그는, 마치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할 겨를도 없이, 그저 관성처럼 무언가를 가득가득 채우며 살았다. 반성할 여유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자루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언제나 가득했다. 가득한데도 충분하지 않아서 늘 허둥거렸다. 자루 속에 가득한 그것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는 말할 수 없고, 말할 필요도 없다. 가득 채운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중요했으니까. 무엇으로든 가득 채워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불안했으니까.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를 추동한 것은 성찰이 아니라 모방과 관성이었다. 모방과 관성에 따라 반사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그저 주워 담았을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자루에 정말로 쓸 만한 것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모방과 관성이 지배하는 현장을 떠나자 비로소 어렴풋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빈 자루에 무엇이 채워질지 황선호는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무엇을 채우려는 시도 같은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보보에 이제 막 도착했고, 이곳은 처음이고, 처음이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해야 할 과제가 없었다. 부여받은 과제가 없다는 것은 적어도 이곳에서 살아갈 날이 5개월 19일 이상 남은 시점에서 그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진실이다. 부여받은 과제가 없다는 것과 그의 삶이 빈 자루라는 건 관계가 있다. 그는 과제 없는 빈 자루의 시간을 이 낯선 도시와 함께 받았다. 그러니까 5개월 19일이라는 시간은 그의 계산 밖에 있는 시간이다. 그의 시간을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보보에서는 더욱 그렇다. 굳이 말하자면 그 시간은, 그가 ‘보스’라고 부르는 광역시장의 계산 속에 있는 시간이다. 보스가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 황선호는 이곳에서의 시간을 중단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 시간이 5개월 19일이라는 건 하나의 가정이다. 시간이 앞당겨질 만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나 기대 같은 건 없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나 기대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 예감이나 기대는 그의 몫이 아니다.
“지금 나는 빈 자루와 같다.” 그는 호텔 창문을 통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바라보거나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이 지역 특유의 향신료 냄새를 견디며 식사를 하다가 최면을 걸듯 가끔 중얼거린다. 그 말을 할 때 들이마시거나 내보내는 공기의 양에 따라 그 말은 터무니없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대범하게 무엇이든 훌쩍 초월해버린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빈 자루와 같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물론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 말고는 없다. 비어 있는 공간을 무엇으로든 채우려는 것이 자연, 특히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빈 자루도 머지않아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목록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광역시에서 황선호는 원하는 것이 많았고 원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 일이 많았고, 하지 않을 일도 많았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과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하지 않기도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기도 하면서 살았다. 달래거나 반박하거나 으르거나 구슬려야 하는 사람들, 올리거나 내리거나 돌려야 하는 문서들, 주거나 받거나 물리쳐야 하는 돈들, 기회들, 사건들. 그것들 가운데 그는 늘 있었다. 그것들의 일부로, 때로는 핵심으로, 물론 일부에 지나지 않은 핵심으로 그는 존재했다. 일과 문서와 사람과 사건들. 야망과 의심과 음모들. 그것들 가운데서 그는 욕망하고 싸우고 타협하며 살았다. 그것들 가운데서 그는 으르렁거리고 속삭이고 덫을 놓고 덫에 치이고 칼을 숨긴 채 웃고 칼을 숨긴 웃음에 찔리며 살았다. 그것들이 그를 지배하고 그는 그것들에게 끌려다녔다. 간혹 그가 그것들을 지배하고 그것들을 끌고 다니는 것 같은 모양새를 갖추기도 했지만, 모양은 모양일 뿐이었다. 그것들과 함께 있을 때 그는, 다른 많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의 일부로 불리었다. 그는, 다른 많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 속한 자였다. 그것들이 그를 다루고 간섭하고 지배했다. 그것들이 그를 부리면서 그에게 지위를 부여하고 신분을 보장했다. 그는 그것들의 그였다. 그것들이 그의 그것들인 것처럼 보인 적은 있지만 실상은 현상과 달랐다. 그것들이 그를 규정했으므로, 그가 있는 곳이 그것들이 그에게 지정한 자리였으므로,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 공허, 빈 자루가 되어버린다고 세뇌되었으므로 그는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다. 참여하고 기여해야 했다.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불가피했다. 생존은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묻지 않는, 물을 수 없는 영역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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