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내가 쓴 것이 나다
남성성의 의미는 없다. 초월적 자아와 같은 대표적 남성성은 그들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낸 의지의 산물이다. ― 웬디 브라운
1인칭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 등장하는 ‘나’처럼 희귀한 존재는 처음 보았다. 아무리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 할지라도 ‘나’의 존재감은 독자에게 명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는 존재감이 너무 희박해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몽상적 존재인 마치니의 존재감은 훨씬 명료하다……. 이 소설의 미학적 바탕은 여기에 있다. ― 정찬
딸: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실종됐다가 8년 만에 돌아온 아빠에게) 오늘 인터뷰에서 뭐라고 하실 거예요?
아빠: 거짓도 진실도 말하지 않을 거야.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뭐 하러 길게 이야기해?
― 미국 드라마 〈홈랜드〉 중에서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2020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책은 그 반대 방향에서 쓰였다. 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 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첨예한 젠더 상황에서 간혹 남성 감독이 여성의 심리를 잘 표현하는 작품이 있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규정하기 때문에, 여성이 자신의 구조적 위치를 자각하고 사회와 경합하기 전까지, 남성이 여성을 ‘더 잘’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1995년에 박철수 감독이 감독·기획·제작하여 개봉한 〈301 302〉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 두 명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젠더와 음식, 섹슈얼리티, 폭력에 대한 여성의 행위와 저항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재현 주체인 남성 영화감독이 대상, 곧 여성의 심리를 잘 아는 드문 영화였다.
물론 재현 주체가 자신의 틀에 맞추어 대상을 규정하는 것은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지배와 피지배는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서구 근대는 이 현상이 자본주의와 함께 전 지구적으로 확장된 시대를 뜻한다. 탈식민주의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유럽을 지방화하기》2000년에서 “그간 길고 길었던 나의 귀향의 여정은 결국 헤겔에게로 가는 길이었다”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읽고 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부정하고 싶은 절망감이 나를 덮쳤지만, 그대로 몸에 각인되었다. ‘우리 것’, ‘나’를 인식하고 찾는 과정조차 ‘그들의’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탈식민은 귀향이 아니라 다른 사회를 만드는 실천이다. ‘전통’도 ‘현대’도 기존의 것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년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 제목이 정말 좋다. 제목만으로 여러 가지 글감이 된다. 비윤리, 무지, 권력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대상작품이 아니다. 글로 쓴 대상을 공부하기 전에 글을 쓴 사람을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재현이 ‘누군가가 쓴 것’임을 인식하고,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 쓴다’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안정된 상태가 쓴 글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안정이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성립 가능하다면 그 안정은 기득권 속의 안정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정한unstable 상태를 존중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과 연대하고 싶다.
글을 쓰는 주체인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대상으로 삼은삼는 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 이것이 맥락적 지식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객관성을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관점은 부분적 시각partial perspective일 뿐이다. 이에 더해 ‘왔다 갔다流着’ 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앎이고 쾌락임을 받아들일 때 외로움도 덜하고 인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이것이 지식의 본질인 맥락성, 상황성이다. 언어가 아무 데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소통 가능하다. “거대 담론 말고 일상성”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이 하는 대화 중 하나는 “어느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일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영화에 관한 ‘독후감’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장르에 비해 영화는 다양한 감각적 요소가 있다. 더구나 영화는 자본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초기 아이디어와 최종 산물 사이에 여러 가지 상황이 개입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겹겹의 예술이다. 얼마나 많은 상황 변화가 있었겠는가. 최초의 구상, 제작, 촬영, 편집 전 과정은 마치 유화에서 덧칠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 애초의 캔버스스크린는 보이지 않지만 이것도 창작의 일부다. 영화는 애초 ‘저 장면의 그 배우의 대사’가 아닐 확률이 큰 예술이다. 제작 기간이 길어지거나 불필요한 논란이 많을수록 그럴 것이다. 디렉터스 컷이나 홍상수 감독의 “촬영 날 아침에 대본 쓰는” 제작 방식은 ‘덧칠’에 대한 대응 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 중 하나는 덧칠된 그림 이전의 작품을 상상하는 것이다. 덧칠은 최종 버전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만든 이의 몸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무의식이 의식화된 형태나 불필요한 장면 따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반전’은 덧칠 이전의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영화 관람은 굉장한 집중을 요하는 독서다. 나는 덧칠 이전의 그림을 확실하게 보고, 영화가 아니라 그 감독창작자을 분석한 사례를 알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절찬과 유명세를 받은 어떤 다큐멘터리를 한 장면, 한 장면 해석하고 썼다. 그 다큐가 만들어진 복잡한 과정, 타협, 작품 자체, 감독의 캐릭터와 역사를 ‘잘 아는’ 나는 (거의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스크린 ‘이전’과 ‘너머’의 글쓴이감독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글쓰기는 인간을 정직하게 보는 윤리 의식과 정의감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영화의 ‘보이는 밑그림들’은 관객들의 개인적 사건이 된다. 개별적인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버전일 수밖에 없다야오이やおい 장르처럼 이미 퀴어 예술가들은 이러한 작업을 해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래서 맥락적이다. 어느 장면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 전후의 서사와 나의 이야기가 조우할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탄생한다.
나는 언제나 나만의 부분적 시각이 독창적 글쓰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부분적 시각은 당파성을 전제한다. 당파성은 글의 필수 요건이다. 아니, 당파성이 없는 글은 없다. 흔히 말하는 무당파도 당파니까. 주장이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주장은 선언될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한다. 이 책은 영화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나의 글쓰기 레시피 공개서다.
물론 이 책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는 독자의 가치관과 ‘좋은 글’에 대한 취향에 달려 있다. 과정이 곧 결과의 일부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수단이 중요한가 목적이 중요한가라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글쓰기 과정이 ‘공개되는’ 글,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판단 기준이 명확한 편이다. 글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글을 읽고 글쓴이의 성격, 인격 심지어 그의 팔자, 글쓴이로서 롱런할지 아닐지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일단 무언가를 보여준 것이다. 글을 읽었는데 글쓴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글, 즉 글 제목 아래 어떤 이름을 붙여도 무관한 글은 생산자 표시가 없는 상품이다. 사기요, 불량품이다. 자기도취적인 글, 현학적인 글, 진부한 글은 좋은 글은 아니지만, 일단 그런 글들은 읽고 작자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어쨌든 판단 가능한 영역에 들어오는 글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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