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당신과 싸우지 않겠다
언덕을 넘어 함께 거닐던 저녁 바람이
아무리 앙칼지게 불어와도
푸른 잎새 노란 어금니를 앙다물고
당신이 증오하는 당신은 되지 않겠다
당신의 그림자로 당신을 덮지 않겠다
길이 갈리면 고요히 손을 흔들며
길에 깔린 기억을 일으켜 세워
지친 당신을 감싸보련다 멀리 있어
가득 차오른 달빛을 보며 둥실
허리를 꺾어 휘파람을 불어보련다
광주행
너를 지우는 시간이 길다
송정리역에서 내려 막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고개로 간다
몇몇 떠오르는 이들에게 연통을 넣을까 말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지 오래되었다
손에 쓸리는 턱수염도 어제 같아서
깨끗이 밀고 네게로 잠행한다
하늘 아래, 날벼락도 이슬비도 휘날리는 깃발도
저항하는 몸도 슬픔도 언어도
붉은 용암으로 분출되는 것을 보았다
묵힌 분노만이 사랑이 된다 애먼
사랑 타령이 아니라 이 지상에 살아가는 동안
눈먼 살을 털고 이백여섯 개의 잠든 뼈를 들쑤셔
어둔 울타리에 갇혀 성난 울타리를 짜고 있는
너와 나를 지우며 간다 오래오래
품으로 깃드는 바람이 깊다
회인에서
― 오장환 시 「성벽」에 대한 오마주
슬프게도 지금은 월북할 나라도 없어
옛날 아비들이 멍든 발과 무릎으로 넘었다는
피반령 고개를 넘어 괴목을 지나
오장환 시인의 생가에 스며들었다
옥빛 하늘보다 고운 마을 이름 회인을 새김하며
지금은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이민족보다 독한
동족들도 없어 목욕탕에도 자유로이 가고
가계부는커녕 일기도 쓰지 않는 나날들을
반성하며 흙 마당에 글씨를 쓰다가 불쑥
그가 불러냈던 빨치산 시인 유진오를 생각했다
오직 시인으로 살고자 제살붙이도 모르는
말과 마음만을 뒤적이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지저분해진 성벽을 향해
속에서 이는 가래침을 뱉었다 슬슬
발로 비비며 묵은 분단의 올무에 걸려 이를
걷어낼 시인이 되려는 시인이 있을 리 없어
시인에게 절 한 자루 올리지 못하고
끈적끈적한 얼굴을 마냥 쓰다듬으며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이 서정시처럼 쓸쓸해졌다, 회인!
*오장환 시 「성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함.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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