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구석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계단을 오르고 있다.
동굴벽화 몇곳에 계단이 그려져 있고
점토판 설형문자는 ‘계단을 올랐다’로 해석되었다.*
계단 끝에서 신들을 만났다는 소문이 돌자
엎드리고, 경배하고, 움츠리는 버릇이 생겼다.
길과 이어진 계단에서 버려진 육체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막다른 계단은 따뜻했다.
‘벽돌 창으로 새어나온 불빛이 계단을 비추었다.
그 빛은 언제나 나에게 사랑의 등불이 되어주었다.’**
스무개의 절망과 한 개의 사랑을 품은 채
늙은 봉우리로 가는 계단에서 네루다는 실종되었다.
지상의 계단이 왜 하늘을 향하는지 아직 모른다.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찰나만큼 수명이 길어질까,
시간은 계단 위를 아주 느리게 파고들었다.
* 조지 이글턴 『계단의 상징, 신에게 가는 길』, 1965.
** 파블로 네루다 「계단 끝 집」, 1971.
아득한 눈길
설날, 춘천에서 화천 큰댁으로 가는 길. 지금은 삼십분 찻길이지만 예전엔 한시간 반, 겨울 눈길엔 두시간도 걸리곤 했다. 보따리를 든 손님을 가득 태우고 완행버스 특유의 부산스러움과 기름에 연기가 뒤섞인 냄새를 실은 채 버스는 눈길을 달렸다. 과거로, 예스러움으로, 추억 속으로. 아, 젊은 엄마와 함께.
화천읍 버스터미널엔 늘 군인들이 많았고, 난로 주변으로 온갖 사투리가 모여들었다. 멀고 먼 길을 몇번씩 차를 갈아탄 사람들이 화천의 겨울과 아들을 찾아왔다. 가족을 만난 7사단의 하얀 별들과 15사단의 노란 달들이 강원도의 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남도의 따뜻한 황토길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미널에 남기고, 울음을 담아 돌아갔다.
하루에 몇번 없는 버스마저 끊긴 눈길.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가는 길은 북한강 바람이 동행한다. 강 언저리로 얼음 어는 소리가 쩡쩡 울리고 산등성이, 대만 남긴 옥수수밭으로 까투리가 자주 날았다. 가도 가도 아득한 눈길. 발이 젖으면 큰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아랫목 냄새를 맡았다. 아, 젊은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서촌, 인왕제색仁王霽色, 이상
서촌에서 어깻죽지가 간지럽다면 금홍을 사랑했던 마음, 이상이 만든 이상적이고 근대적인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고대 이카로스의 날개를 갖게 되었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사랑하게 되어서 송강 정철의 집터까지 가다보면 ‘중국’이라는 작은 국숫집, 깃발을 내리면 영업이 끝났다는 것, 번번이 발길을 돌리면 관동에는 절친 율곡의 집, 오죽헌에 남긴 금주禁酒 십계명은 율곡의 반듯함을 생각하게 했는데, 당쟁을 중재하고 두주불사 송강과 세상을 논하고 종묘사직을 걱정하며 율곡이 마신 술이 얼마나 될지, 나의 옛 스승은 간경화로 인해 천재天才를 일찍 거둬들여야 했으나, 길 건너 경복고등학교 쪽에는 드디어 겸재가 율곡을 사모하며 밝은 눈을 더해 조선의 마음, 색을 끄집어내었는데, 인왕이 매일매일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었으나 우리의 마음까지 요동칠 줄 어찌 알았던지, 북방에서 온 ‘동주의 별’이 인왕제색 앞에 오래 머물러 자하문 쪽으로 졌을 것, 여항의 젊고 도발적이며 권위와는 담을 쌓았던 시인들이 골목골목 지금도 마음의 색을 바꿔내고 있는데, 오직 북악 아래 외로운 군왕만이 율곡에게 지혜를 묻는다.
날개는 아직 녹아내리지 않았고, 여전히 서촌을 헤매고 있는 이상李箱, 이상理想, 이상異常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