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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또는 보수
― ‘백서’ vs ‘흑서’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지향 혹은 대립 구도를 설명할 때 흔히 쓰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보수’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권은 ‘진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촛불시위다.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촛불시위는 정권이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연결고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성격을 강화하는 촉매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 정권’이 들어선 후 우리가 보는 풍경은 과연 그랬던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진보 정권’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충분한 변화를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진보 정권’을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정권이든 시간이 지나면 지지는 유실되기 마련이고, 어찌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등을 돌리는 사람 중에는 ‘진보 정권’이 기대만큼 진보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 똑같다’는 식의 배신감을 느낀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처럼 정치적 지향이 명확한 경우라면 ‘진보 정권’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게 대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정권이 바뀌면 그저 상식적인 정치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보수 정치를 지지하기로 마음을 먹거나, 특별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지 않을 것 같은 ‘제3세력’ 또는 그런 가능성을 지닌 인물 세력으로 눈길을 돌리거나, 아예 정치를 멀리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무엇일까? 진보 성향이었던 사람이 보수로 변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2019년 ‘조국 사태’는 이런 의문이 가장 격렬한 형태로 제기된 사건이다. 진보적 가치와 이를 따르는 삶을 말하던 사람이 자녀 입시와 사모펀드를 활용한 재산 증식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렸다는 것을 대중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사건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법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무죄 판결과 관계없이 이 사건은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이 문제는 법적 결론과는 별개로 사회적 논의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개혁을 위해 ‘적폐’ 기득권과 싸운다던 세력은 이 사건을 통해 앞에서는 ‘진보’를 외치면서 뒤로는 자기 배를 채우는 위선자란 비난을 받게 되었다. 2019년에 조국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불거진 이 문제는 2020년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의원을 둘러싼 논란과 엮이면서 진보의 타락을 증명하는 사건처럼 계속해서 소비되는 중이다. 이제 ‘진보’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는 시행착오를 겪는 선량한 인물들이 아니라, 겉으로는 운동입네 하지만 실제로는 피해자를 내세워 후원금을 긁어모으고 이를 부동산, 주식 및 펀드에 투자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사기꾼으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이들 중에는 과거 ‘진짜 진보’를 자처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짜 진보’란 이른바 민주 세력을 사회를 변화시킬 의지가 없는 정치 세력으로 평가하며 대안으로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지지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중 ‘사회적 스피커’를 자처하는 몇몇은 모여서 방담한 기록으로 아예 책을 내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책을 뒤에 얘기할 ‘조국 백서’와 상반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조국 흑서’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국 전 장관으로 대표되는 민주 세력은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발판으로 출세를 추구해 왔으며, 이를 이용해 축적한 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등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을 이용하고 있다. 자칭 민주 세력이 내세우는 민주주의나 검찰개혁은 이들의 기득권적 행태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호이거나 펀드 사기 등 불법 행위를 덮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세계관에서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바로 그 권력에 복수를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반면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쓴 ‘조국 백서’는 상황을 달리 본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검찰이 개혁에 저항하기 위해 검찰개혁의 상징적 인물을 겨냥해 기획 수사를 시작한 데 있다는 것이다. 조국 전 장관 가족이 거액의 돈을 펀드에 투자한 것은 오해이며, 대중적 거부감을 유발할 수는 있으나 죄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녀 입시와 관련된 의혹 역시 근거가 없고, 다만 ‘스펙 품앗이’ 등은 초 엘리트 계층에 일반화된 편법적 문화의 문제일 수는 있어도 이 책임을 조국 전 장관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국 전 장관은 부당한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에 난도질당한 피해자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흑서와 백서는 같은 현상을 놓고 상반된 서사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민주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조국 백서’의 내용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들의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흐름을 보였다. 이런 현상은 반대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국 흑서’에 대한 보수 세력의 태도이다.
보수 세력은 과거 이른바 진보 진영의 대표적 스피커였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민주 세력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반가움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보수 언론의 행태에서도 드러나는데, 진중권 전 교수가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글을 연일 중계하듯 기사화하면서도 지면의 칼럼 등에서는 보수 정치가 특정 진보 인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 것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기도 했다.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 ‘조국 흑서’의 존재는 정권 비판의 당위와 논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분명 득이지만, 보수 정치가 스스로 그러한 일을 주도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즉, 성과가 온전히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보수 세력은 ‘조국 흑서’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진짜 진보’를 자처한 ‘조국 흑서’ 저자들의 입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중권 전 교수는 일부 보수정당이 만든 자리에 강연자로 나섰고, 안철수 전 의원이 만든 유튜브 방송에 초대되어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진중권 전 교수로서도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 인사들과 함께하는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식인으로서 정권을 비판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나름의 정치윤리가 진중권 전 교수와 보수정치의 가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면에서 ‘조국 흑서’ 저자들 역시 전적인 확신이 없는 상태로 보수 정치와 일정 부분 가까워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배신’으로 보는 모양이다. 과거에 ‘진짜 진보’를 자처하던 사람이 이제는 보수 정치의 편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배신이라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들의 배신은 무엇을 노린 것일까? 돈일까, 명예일까? 여기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의 소재가 되는 것은 ‘관심’이다. 대중의 관심도 경제적 요소로 취급되는 사회가 한국이다. 진중권 전 교수 등이 사회적 소음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관심을 모으고 그것으로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배신자론’의 근간이다.
세상만사 100%인 것은 없기에, ‘조국 흑서’를 만든 사람들의 속마음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행동의 동기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윤리와 ‘관심’을 통한 사익 추구 의도의 비율. 우선순위를 따질 일도 아니다. 이 문제가 당사자에게는 중요할지 모르나 우리 공동체의 앞날을 위해 논할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객관적 시각으로 현상을 분석하는 ‘외부’의 입장에서 이런 현상이 ‘조국 흑서’ 저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성질의 것인지, 아니면 정치·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인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진중권 전 교수가 진정한 지식인인지 배신자인지를 논하는 것보다 ‘조국 흑서’라는 현상이 특수한 것인가, 보편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훨씬 사회적으로 가치 있지 않을까?
백서와 흑서는
무엇을 반대하고 있나?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조국 전 장관이 겪은 일을 이전 정권의 책임자들이 똑같이 겪었다면 ‘서초동 촛불’이나 ‘조국 백서’ 편찬 같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닐 것이다. 왜일까?
예컨대 국정농단의 장본인인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씨의 외마디 외침을 기억해 보자. 박영수 특검의 소환에 응하지 않던 최순실 씨가 2017년 1월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불려 나와 법무부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고함을 지른 일은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라는, 당시 현장에 있던 청소노동자의 반발과 함께 어떤 헤프닝처럼 되었다.
그런데 당시 특검팀에 이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는 윤석열 검사를 비롯해 전형적인 ‘특수통’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최순실 씨에 대한 수사는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파는’, 전형적인 특수부 스타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최순실 씨의 외침은 이에 대한 반발이었다. 물론 최순실 씨와 조국 전 장관이 한 일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달라야 하지만, 적어도 ‘억압적인’ 검찰 수사 자체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순실 씨 사례를 근거로 검찰개혁을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식 밖의 사람이라고 의심받을 것이다.
왜 최순실 사례에는 침묵하면서 조국 문제에 있어서만 행동에 나서느냐는, 요컨대 ‘내로남불’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은 반대편을 향한 만능 논리처럼 제기되곤 하는데, 대개 정치적 사건을 개인화해 본질로부터 분리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의 논의는 양심이 없는 어떤 사람이 ‘내로남불’과 같은 규범 위반을 저질렀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의 핵심은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가’가 아니라,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있다.
이제 최순실 씨의 외침은 해프닝이 되고 조국 전 장관이 겪은 고초는 ‘조국 수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따져보자. 이 두 사례를 하나의 기준으로 이해하려면 누가 어떤 것을 반대하는지를 정리하면 된다. 최순실 씨 사건에서 당시 야당과 시민사회, ‘진짜 진보’와 특검 수사는 모두 국정농단이라는 범죄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담론으로 조직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최순실 씨의 “민주주의의 특검이 아니다”라는 항변은 그를 반대하고 있는 세력의 시각에서 볼 때는 ‘반대해야 할 대상’의 방어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조국 전 장관의 사례에서 ‘서초동 촛불시위’의 참가 세력이나 ‘조국 백서’의 집필진은 ‘검찰개혁’을 주장했지만, 본질은 검찰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담론으로 귀결되었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사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 혹은 현직 법무부 장관을 대상으로 수사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검찰의 주장은 최순실 씨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반대해야 할 대상’의 방어 논리로 취급되었다. ‘조국 수호’라는 구호에는 이 구도가 반영되어 있다. 이런 도식은 ‘조국 흑서’ 저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조국 흑서’와 보수 정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담론으로 조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개혁’이라는 주장은 어떤 면에서 인정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대해야 할 대상’의 핑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다못해 우리가 룸메이트와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끼듯이, 이질적 개별 세력이 오직 무언가를 반대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구실이 필요한데, 이 구실이 되는 정치적 담론에 필연적으로 ‘서사’가 동원된다. 백서와 흑서 모두 조국 전 장관을 개인화해 전형적인 선인 혹은 악인으로 가정하고, 나머지 문제는 이를 기준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국 백서’의 편에 선 사람들이 보는 조국 전 장관은 앞에서도 묘사한 바와 같이 검찰개혁을 묵묵히 추진하다 검찰로부터 통한의 반격을 당한 피해자다. 이는 조국 전 장관이 생일이 지난 딸을 축하하려는 듯 케이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뒷모습으로 요약된다. 조국 전 장관 일가의 펀드 투자는 상식적으로 판단해 문제가 없으며, 이들이 투자한 펀드의 운용사에서 일어난 여러 위법적 문제들은 조국 전 장관 일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오직 검찰개혁을 거부하려는 의도만으로 조국 전 장관 일가를 사회적으로 멸문시키기 위한 악랄한 수사를 자행했다. 여기서 밀리면 검찰의 사악한 칼날이 또 어디를 향할지 모른다. 실제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로 이런 이유로 스스로 비극적 선택을 해야 했다. 이런 과거를 반복할 수 없는 ‘촛불시민’은 조국 전 장관과 더 나아가 문재인 정권을 지키기 위해 실질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런 인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국 전 장관의 문제를 대하는 검찰의 수사 방식은 일부 과잉된 면이 있었고, 그 배경에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배우자에 대한 기소를 강행한 것은 공소시효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수사 외의 맥락에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찰 수사의 독립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려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밥을 먹지는 않듯이, 검찰이 오직 검찰개혁에 저항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조국 전 장관 수사를 강행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언론이 조국 전 장관의 펀드 투자와 자녀 입시 문제에 대한 대대적인 의혹 보도를 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자. 보도의 진실성이나 언론과 권력의 유착은 별도로 다루더라도, 그 정도의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인데도 검찰이 여러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수사에 나서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정치검찰’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것이 아니었던가? 검찰이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려면 중요한 정치 일정은 판단에서 배제하고 수사 논리 그 자체만을 고려하는 것이 답이다. 따라서 과잉 수사나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으나 수사 착수 시기 등 다른 조건을 근거로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이를테면 조국 전 장관이 후보자로 지명되고 나서 검찰이 본격적인 수사를 강행한 것은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즉 ‘시점’이 문제였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검찰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혹을 수사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당시의 조국 후보자가 법무부 장관이 된 이후에는 지휘감독권을 가진 인사를 대상으로 하게 된다는 점에서 수사는 이전보다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법무부 장관을 퇴임한 후 또는 정권이 바뀐 후에야 수사에 착수하는 것은 그간의 범죄 피해를 검찰이 방조하는 꼴이 된다. 검찰로서는 어떤 경우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장관 후보자가 장관에 임명되기 전에 수사에 나서는 것이 사실상 유일하게 사리에 맞는 선택지다.
일부에서는 검찰이 보수 정치에 속한 인물들이나 검찰총장의 가족 및 측근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선택적 수사’, 즉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 역시 해당 수사를 원칙대로 강행할 것을 주문하면서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될 일이다. 이런 일들은 검찰의 조국 전 장관 수사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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