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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라스트 인터뷰
(…)
“내가 쏟아낸 말들이 내 뒷골에서 웅웅거려.”
나는 선생의 코앞에 이른 죽음과 병마에 함께 쫓기는 기분으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보냈다. 도끼날이 얼음을 내리치듯, 칼바람 일던 어느 아침에는 바람 구두를 신고 먼 길을 떠날 사내처럼 선생은 한달음에 말했다. “내년 삼월이면 나는 없을 거야. 그때 이 책을 내게.” 노인의 목숨을 노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의 집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듯한 두려움에, 나는 매번 찬바람을 일으키며 초인종을 누르기가 송구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자세로 나를 맞았다. 통창으로 산 그림자와 빛이 쏟아지는 그의 저택에서 나는 한 번도 주눅 든 적은 없었지만, 선생이 풍기는 위용에 여러 번 숨을 고르곤 했다.
어둠과의
팔씨름
“작년 시월에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에서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꾼다고 하셨죠.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죽음이 곁에 누웠다 간 느낌이라고요. 평생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던 선생님은 드디어 곁에 가까이 와서 누운 죽음을 잘 사귀어보기로 하셨고, 그렇게 알게 된 그 미스터리하고 섬뜩한 친구에 대해 저와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기로 하셨어요. 요즘엔 어떻게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요즘엔 밤마다 팔씨름을 한다네.”
“팔씨름을요……? 야밤에 깨어 누구와 팔씨름을 하십니까?”
근육이 빠져 더욱 얇아진 스승의 팔뚝을 나는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매일 밤 나는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네.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말이야.”
나는 어둠의 혈관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포효하는 나의 스승을 상상해보았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그는 파일을 열어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감정을 자제한 드라이한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이해하겠나?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이생에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둠의 심연을 직면했던 현자의 눈에 파르르 지혜의 불꽃이 일었다. 예일대 교수인 셸리 케이건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로 수업의 서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친구와 작별인사를 했어. 우주의 시간은 달라서 돌아오면 2백 년이 훌쩍 지나버려. 지구 시간으로는 마지막 만남이니, 그게 결국 죽음인 거라. 그런데 웬걸. 그 우주선이 출발하다가 중간에 폭발을 해버린 거야. TV 중계로 그걸 지켜보던 친구가 깜짝 놀랐겠지. ‘아이고, 내 친구가 죽어버렸네.’ 그제야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럼 아까 죽음은 뭐고, 지금 죽음은 또 뭔가?”
“글쎄요…… 내 눈앞에는 없어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도 ‘어딘가에 있다’라는 인식이, 우리를 견디게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드라이하게 이야기해보지. 고려청자가 있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네. 고려청자는 무덤 속에 있었어. 이걸 5백 년 후에 발굴했다면, 내 눈앞에 없었어도 고려청자는 5백 년을 존재한 거야. 그런데 이게 깨지면? 눈앞에서 소멸하니, 그 순간 ‘아이고 이걸 어째’ 하고 한탄을 하지. 소급해보면 무덤 속에 있을 때, 이미 우리 앞에 없었던 것 아닌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그가 유리컵을 가져다 내 앞에 두고 결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죽음에 관한 느슨한 아포리즘을 기대했던 나는 당황했다. 선생은 마치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한 후 실험 도구를 앞에 두고 흥분한 과학자처럼 보였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며)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을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컵 하나로 바디와 마인드와 스피릿, 현존과 영원을 설명하는 이어령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버리다니! 스승은 풀피리 불 듯 말을 이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겠습니다.”
“그렇지. 그건 실제로 유리컵 안의 공간의 문제라네.”
“빈 공간이 많을수록 영적인 공간이 커지는 거겠지요?”
“만원버스를 생각해보게. 사람이 꽉 차서 빈 데가 하나도 없는 게 바로 영혼 없는 육체라네. 유명한 일화가 있어.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마인드로만 채우고 살았는지 영혼으로 채우고 살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깨지고 나면 알겠지. 미안한 얘기네만, 대체로 정치가들의 바디에는 마인드만 꽉 차 있어. 깨지면 남는 게 없어. 빵, 돈 이런 것들만 남겠지. 시인, 화가, 종교인…… 비어 있는 영혼의 세계를 이야기한 사람들은 영원히 가. 우주와도 통하니까.”
“문득 윤동주와 고흐가 떠오릅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과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그들의 눈은 비어 있음으로 무엇을 본 걸까요?”
“(눈을 빛내며)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겠네.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이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 만 물질의 찌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 나지. 이 책상이고 안경이지. 이건 과학이네. 상상력이 아니야.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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