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들은 왜 혐오하는가?
나는 쿠르드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터키 이민자 출신이다. 그리고 2007년 덴마크 의회에 입성한 최초의 소수 민족 여성 의원 중 한 명이다. 내가 혐오 메일을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해부터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혐오로 가득한 메일수신함에 금세 익숙해졌다.
‘너 같은 파키Paki,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 이민자를 비하하는 혐오 표현 ― 옮긴이가 우리 의회에서 뭐하는 거야!’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주로 이런 글이었다. 아니면 간단하게 ‘테러리스트년’이라고만 적어 보내기도 했다.
삭제. 삭제. 삭제. 답장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공통부모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무지 안에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들과 말을 섞는 건 순전히 시간 낭비이자 노력 허비로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가 이 메시지들을 저장해 두라는 제안을 했다. “적어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경찰이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만약’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라고 말한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나 싶었지만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이메일을 다 저장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메일들은 그냥 쌓이기만 하고 뇌리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런데 상황은 정말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2008년, 여름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집 우편함에 카드가 하나 와 있었다. 봉투는 덴마크 국기로 장식돼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보통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국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파티 초대장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내용물은 내 짐작과는 전혀 달랐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네 테러리스트 형제들한테나 돌아가라고!” 덴마크 협회Danish Association ― 덴마크 극우 세력에 뿌리를 둔 단체 ― 에서 보낸 카드였다. 그들이 우리 집 주소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섬뜩했지만, 더 소름 끼쳤던 건 봉투에 우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카드는 우편으로 온 게 아니었다. 누군가 직접 우리 집 우편함에 넣고 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와 나를 욕하고 괴롭히는 자들 사이에 ― 우리 아이들과 그들 사이에 ―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일순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누구건 마냥 안심하기에는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와 있던 것이다.
그 즉시 나는 모든 공공기록에서 우리 집 주소를 지우는 절차를 밟았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과 학교 이름도 공개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내가 의회 토론에 참여하면 할수록 더 주목 받을 거고, 그럼 위협과 괴롭힘 역시 지속될 거란 사실도 알았다.
위협의 내용은 모호한 것‘우린 네가 어디 사는지 알아’에서부터 끔찍할 정도로 구체적인 것‘네가 장관이라고 되는 날이면 네 목을 떼 주마’까지 다양했다. 협박 메시지가 도착하면 받아서 읽어 본 다음 경찰에 넘기는 일이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2010년 봄부터는 네오나치 한 명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위협 정도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는 과거에 길에서 무슬림 여성들을 공격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8개월 넘게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떨 때는 하루에 40통 이상 온 적도 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집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동물원 나들이를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진동벨이 울렸다. 나는 틀림없이 그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우리는 이제 막 동물원에 도착해 겨우 사자 우리 정도만 봤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우리 가족의 모처럼의 하루를 절대 그 사람이 망치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문자 메시지 내용상 그가 동물원에 있는 것이 ―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 확실했다.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집에 도착하자 첫째 아들 푸르칸Furkan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엄마, 그 사람은 엄마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
나는 “세상에는 그냥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어.”라고 대답했다. 당시에는 이 정도면 현명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착한 편이고 그 사람들이 나쁜 편이야.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된단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끝나길 바라다니! 그 사람 때문에 내 삶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내가 매일 밤 퇴근할 때마다 다른 장소에 주차를 하는 이유도, 길에서 항상 주위를 살피는 이유도, 더는 우리 아이들과 바깥 나들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그 사람 때문이었다.
동물원 사건이 있은 지 몇 주 후, 나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친구 야콥 홀트Jacob Holdt 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는 《사진으로 본 미국American Pictures》이라는 사진집으로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를 기록했던 경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 일 때문에 내가 기대고 울어도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내가 느낀 두려움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멍청한 네오나치 때문에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게 된 상황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나는 그가 위로와 안심이 되는 말을 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듯, 너도 지금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잖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난 절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냐! 지금 나보고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건가? 물론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미워했던 적은 있다. 어떤 집단 사람들은 되받아서 나를 미워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적인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과거의 기억은 전부 묻어 버리고 말이다.
“네 친구나 가족 중에 우익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돼?” 야콥이 물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과 말을 섞기나 하니?”
이번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그런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사실, 오랫동안 이건 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친구들에게 대안우파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극우 운동으로, 다문화주의와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백인우월주의, 국수주의를 주장한다 ― 옮긴이 계열의 덴마크 국민당Danish People’s Party 소속 국회의원들과는 악수도 하지 않는다고 많이 으스대기도 했다.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야콥의 제안이 있기 전까지는, “가서 그들을 만나 봐. 네 아들은 더 나은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어.”
“그 사람들을 만나라고?! 아마 날 죽이려 들걸!” 내가 말했다.
“아니, 그 사람들은 국회의원은 죽이지 않아.” 야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쨌든 혹시라도 그러면 넌 순교자가 될 테니 윈-윈 아냐?”
그 시점에 순교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퍽 안심이 되었다고 하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야콥의 말이 씨앗이 돼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싹텄다. 그 결과, 그해 가을 경찰이 추적 끝에 내 뒤를 쫓아다니던 남자를 찾아냈을 때,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화해 조정을 위한 만남을 제안할 수 있었다. 그는 거절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혐오를 못 본 척 무시한다고 혐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혐오가 무엇인지 더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덴마크인 무슬림을 싫어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내 메일 수신함이 분명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받은 혐오 메일은 수백 통에 달했다. 몇 안 되는 같은 발신인이 여러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 나를 ‘파키!’, ‘테러리스트’, ‘쥐새끼 같은 무슬림’, ‘창녀’라고 부르며 시작했다. 덴마크어가 이렇게 다양한 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니 놀라웠다. 나는 혐오 메일을 보낸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야콥의 제안대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문제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 내 목표는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전향시키는 데 있었다. 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슬림과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 될까? 대체 나는 어떤 기적을 상상하는 걸까? 확실치 않지만 자기만의 편견을 지닌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근거 없이 일반화하는 그들의 잘못을 어쩌면 고칠 수 있으리라 기대했나 보다. 나는 미덕의 전형이 되고 싶었다. 성실히 일하고, 법을 준수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무슬림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바로 그런 살아 있는 증거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망상임을 잘 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내게 구원자의 임무가 맡겨졌다고 믿었다. 나는 정의감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찾아가겠다는 제안을 나도 모르게 해 버렸다. ‘커피 타임’이라는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2010년 겨울, 가슴속에 나와 나 같은 사람에 대한 혐오를 품은 사람들과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대화하는 여정이 막을 올린 것이다.
그 결과로 수백 건의 만남이 성사됐다. 그 하나하나가 편견 ― 그들의 편견은 물론 나 자신의 편견까지 ― 을 이해하는 길로 가는 디딤돌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구원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사람들을 설득하려 노력하거나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신 그냥 열심히 경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 두려움, 혐오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찾고자 노력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