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우리는 식물과 그 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생태를 배워가는 식물 애호가들이다. 아마추어로서 우리는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읽기로 했다. 몇 해에 걸쳐 생계를 위한 일과 외의 시간 전부를 들여 각자 간직하고 있는 『조선식물향명집』사본을 해지도록 읽었으며, 자료를 모으고 협의와 토론을 거듭했다.
왜 우리는 『조선식물향명집』을 읽어야 했을까?
이웃 나라 일본은 1940년대에 식물도감 기술의 한 부분으로 자국명일본명의 유래를 포함시켰다. 『마키노일본식물도감牧野日本植物圖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식물명한국명을 도감이나 식물학 관련 문헌에 관행적으로 기재했을 뿐, 그 유래나 어원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다. 충분히 해설되지 못한 식물명의 빈 공간은 소위 민간어원설로 채워졌다. 즉, 그 이름이 생겨난 시대에 식물과 사람이 맺어온 관계와 언어 변화에 따른 역사를 추적하지 않고, 그저 현재의 관점과 언어로 얼기설기 엮은 해설이었다. 우리는 우리 식물 이름의 뿌리를 알고 싶다는 목마름을 느꼈다. 이것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읽게 된 계기다.
정태현 박사가 식물을 채집하고 근대 분류학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한 1910년으로부터 100여 이 지난 최근에서야 비로소 식물의 한글명과 그 유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적들이 출간되고, 식물분류학이나 식물생태학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도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그런데 항간에는 『조선식물향명집』이나 그 저자들에 대한 연구나 이해 부족으로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돌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물 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위해 조선을 조사하면서 일본어로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옛사람들이 식물과 함께 생활하며 만들고 발전시켜온 우리말 이름인 ‘광대나물’, ‘벼룩나물’, ‘벼룩이자리’, ‘등골나물’, ‘곰취’, ‘호랑버들’, ‘개불알꽃’, ‘등대풀’ 등이 줄줄이 일본명의 번역어로 취급되는가 하면, 나라 잃은 슬픔과 원망이 쌓여 언중言衆 사이에 형성된 ‘망초’ 같은 이름은 비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일제의 식민 체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 수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권 피탈의 고통 속에서 피지배민이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인 식물 관련 실무자와 학자가 식물 연구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 과정이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의 언중이 사용하는 실제 식물명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조선의 산림·문화·전통을 서로 연결 지었으며 동시에 근대 과학의 보편성을 수용했다. 식민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자주적 과학 탐구의 씨앗이 된 연구였다. 그 소중한 결과물이 『조선식물향명집』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이해했기에 근거 없는 평론에 맞서 그 책을 다시 읽어야 했다. 우리가 『조선식물향명집』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했던 이유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식물의 조선명에 대한 연구와 기록 작업을 가리켜 ‘명명命名’이라고 하지 않고 ‘사정査定’이라고 했다. 사정은 말 그대로 조사해 정하는 작업이다. 먼저 과학적 분류 방법을 습득하고 표본을 대조하며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 이후에 쓰이던 이름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식물 분포지를 찾아다니며 실제 사용하는 이름들을 조사했고,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 등 옛 향약鄕藥 연구서들까지 검토했다. 그러면서 뛰어난 명명자들의 머릿속에서 창출된 고상하고 교양 있는 이름이 아닌, ‘공통 언어를 가진 사람과 식물이 맺어온 관계의 역사’를 온전히 드러냈다. 그렇게 기록된 식물명은 조선인이 조선어로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이해와 맺어온 관계를 나타내는,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되었다. 저자들이『조선식물향명집』에서 사정한 이 방식이 바로 우리가 『조선식물향명집』을 읽은 방법론이자 이 책 서술의 기본 방식이다.
이 책은 식물명 유래를 다룬 기존 문헌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조선식물향명집』이 식물명을 사정한 방식에 따라 식물명의 유래를 추적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사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료와 문헌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기 위해 국내외 고서점과 도서관, 웹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투입했다. 특히 『조선식물향명집』이 저술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사용한 식물명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 그 저자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관계없이, 또한 기존 식물학이나 국문학 관련 문헌에서 전혀 다루지 않던 것이더라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분석, 정리했다.
둘째, 이 책은 식물분류학 및 식물생태학에 근거하되, 어떤 식물명이 일제강점기 이전에 형성되어 유래한 경우 그 어휘적인 의미와 유래에 관한 국어학계의 연구 성과도 수용했다. 또한 동양 본초학의 전통 위에서 남겨진 이름인 경우 한국, 중국 및 일본의 본초학 연구 성과도 수용해 반영했다. 셋째, 조선명의 기록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공저로 되어 있으나 정태현의 공헌이 압도적이라고 평가되는 다음 서적들을 우리나라의 식물 서적으로 보고 그 식물명을 고찰했다. 『조선삼림수목감요朝鮮森林樹木鑑要』1923, 『조선산야생약용식물朝鮮産野生藥用植物』1936, 『조선산야생식용식물朝鮮産野生食用植物』1942.
넷째, 『조선식물향명집』이후 식물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분석과 검 토 자료에서는 주요한 것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현재의 식물명 표기에 상당한 영향을 남긴 식물학 논문과 문헌 역시 분석해 반영했다.
다섯째, 민족 분단으로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북한에서 정립된 식물명의 경우, 최종 이름만을 추적하는 기존 문헌과 달리 북한의 광범위한 식물학 서적을 추적하고 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2018년 기준 최근 자료를 통해 그 변화의 축과 계기에 따라 분석·정리해 반영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과 맺어온 관계를 나타내는 식물명, 그 역사와 유래를 알려주는 보고寶庫다.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 중 1,944종에 대한 학명, 일본명, 조선명을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한 명집名集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녹아 있어 넓이와 깊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겠다. 우리가 이 광범위하고 심연 한 보고의 근처에라도 가보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저작 덕분이다.
• 한국 식물명의 발전과 흐름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한 문헌
― 이우철, 『한국식물명고』, 아카데미서적(1996)
― 이우철, 『한국식물명의 유래』, 일조각(2005)
• 한반도 분포 식물종의 학명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한 문헌
― Chang, C-S., Kim H., and CHANG K.S. Provisional Checklist of Vascular Plants for the Korea Peninsula Flora(KPF)(2014)
• 『조선식물향명집』과 그 저자들의 헌신 및 의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문헌
― 이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 연구」, (1910~1945): 조일 연구자의 상호 작용을 통한 상이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학위 논문(2012)
― 이정,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 일제강점기 조선의 향토적 식물 연구」,
『한국 과학사학회지』Vol.37 No.1(2015), pp.265-298
― 이정, 「식물연구는 민족적 과제?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물학자 도봉섭의 조선 식물 연구」,
『역사와 문화』 25(2013. 5.), pp.89-121
― 이우철, 「하은 정태현 박사 전기」, 『하은생물학상 25주년』, 하은생물학상이사회(1994)
『조선식물향명집』과 그 탄생 과정에 깃든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새삼 새기며,
2021. 8. 편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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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주신 식물학 박사 서효원 님과 꽃이야기 작가 송우섭 님께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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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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