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
─ 서영주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꽃나무를 중심으로 마음껏 원을 그리면 어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중심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위를 까마귀 한 마리가 비행하고 있다. 꽈악- 따듯한 오후는 서서히 물러가고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빛을 잃은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어린 것들은 질주를 멈추었다. 꽈악- 안개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한 치 앞을 보기가 어렵다. 망설이던 어린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앞으로 뒤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향했다. 꽈악- 나무의 줄기에 누워있던 할미가 혀를 차며 일어나 앉았다, 쯧. 불어오는 바람의 도움으로 꽃나무는 잎사귀를 부딪쳤다.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면 그때마저 긁어주마.”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온 할미는 나무의 기둥을 두들기고는 사라졌다, 툭툭. 멀리서 사람의 윤곽이 보인다. 아일이었다.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달려오는지, 걷는지, 멈추는지, 오는지 알 수 없는 걸음이었다. 아일은 오줌이 마려웠다. 길 한가운데서 볼일을 볼 수 없었다. 발을 굴렀다, 동동.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약속했던 장소였다. 그러니, 조금만. 하던 아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와그작.
“에이, 시발 못 참겠다.”
큰 구덩이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일은 급하게 바지를 내리고 쉬╶ 하다가 그만. 아일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어둠 속으로, 깊은 곳으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일은 허전했다, 무척이나. 바지를 추켜올리면서도 어안이 벙벙하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구덩이 속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멍하니.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다. 무엇을 잃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찾아야 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바닥에 엎드려 구덩이 손을 넣는 것이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개미가 집을 짓는 땅은 생명의 냄새를 풍겼다. 그 속으로 빠지기 싫었던 아일은 아무것이나 잡히라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다, 꽈악. 반쯤 몸을 넣었다.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헤집었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구덩이 속에서, 계속. 무엇을 따라 자신도 빠질 것만 같았다. 경련이 왔다. 한 시간 전에 끊은 담배가 생각났다, 간절히. 구덩이를 향해 침을 뱉었다. 무언가를 구하기에는 소용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싶었다. 존재하지 않는 희망에 대한 쓸모없는 의식이었다. 아일은 몸을 돌려 누웠다. 팔이 저렸다, 점점.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폈다가 오므렸다가 폈다가 오므렸다가를 반복했다. 단순한 몸짓이었는데도 안쪽 손목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꽈악- 까마귀가 하늘에서 울고 있었다. 저 까마귀는 텃새라는 큰부리까마귀일까, 철새라는 떼까마귀일까.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곱씹으며 아일은 울고 싶었다, 그저.
“무슨 일 있나요?”
아일의 위로 이해가 나타났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움직여도 입이 닿을 것 같았다, 꼭. 이해는 아일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찾고 있습니다.”
“무얼요.”
“담배요.”
“아, 담배요.”
“여기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이해는 아일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이해가 라이터를 켜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아일은 깊게 숨을 들이켜다가 이해와 눈이 마주쳤다. 구덩이에 물고 있던 담배를 던졌다. 이해는 떨어지는 담배를 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찾고 있습니다.”
“무얼요?”
“모르겠는데요.”
“모르는데 왜 찾아요?”
“중요한 것일 테니까요.”
“중요한 게 뭐죠?”
“모르겠어요.”
“모르는데 왜 찾아요?”
“중요한 것일 테니까요.”
“중요한 게 뭐죠?”
“몰라요. 그러니까 찾는 거죠.”
아일은 말꼬리를 물고 또 무는 이해가 탐탁지 않았다. 아일은 몸을 돌렸다. 다시 구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해는 아일의 발끝으로 갔다. 온몸이 떨렸다, 부르르. 외로웠다. 그래서 그를 따라 했다. 이해는 함께 엎드리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고 여겼다. 아일처럼 이해도 구덩이에 팔을 넣어 젓는다. 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손에 잡고 싶다고 바란다, 간절히. 중요한 것을 찾아준다면 아일도 자신처럼 무언가를 함께 해줄지 모른다. 또다시 찾아온 이 긴긴밤. 드디어 이 외로움을 이겨낼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에 기댄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대가를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돕고 싶었다. 그래, 그저 찾아주고 싶었다고 마음을 바꾸면 어떨까. 이해는 자신을 세뇌한다. 그래, 그렇게 믿으면 된다. 아일은 이해가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해는 아일의 발에 신경이 쓰였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저 발이. 온몸의 힘을 발끝으로 모으는 저 아일이. 버둥버둥하는 저 모습이. 거슬렸다. 저 모습은 도움을 받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이해는 아일과 같이 구덩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깊이, 팔을 넣었다.
아, 저 발을 치워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저 사람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해는 구덩이를 향해 뻗었던 손으로 아일의 발을 두들겼다.
“저,”
아일은 들리지 않았다.
“저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기 발,”
아일은 자신의 발아래에 이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기 발 좀,”
발? 아일은 찾는 것을 멈추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얼른 찾고 떠나고 싶은데. 저 사람은 여기 왜 있는 거야. 아일은 자기 멋대로 가지 않는 이해를 바라보았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방해라도 하지 말 것이지. 아일은 이해의 모습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만 좀 발발거리죠.”
“네?”
“그만 좀 발, 발하지 말라고요.”
이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만 좀 발발거려야 하는 게 누군데. 역시 순수한 마음은 이용당하기 쉬웠다. 이해는 자신을 자신 마음대로 하려는 아일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이해는 두 손을 땅으로 짚었다. 이 긴긴밤을 함께 할 다른 이를 찾아야겠다.
두 코브라는 서로를 향해 넓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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