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랑은 감정의 모든 것이다
사랑은 특정 대상을 향한 느낌이고 감정이다. 사랑을 하면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우리를 아늑한 행복감으로 이끈다고 알려져 있다. 뇌과학자들은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호르몬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감정은 슬픔과 절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국의 로큰롤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네가 여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Wish you were here」라는 노래처럼 “언제나 같은 그 오래된 불안The same old fears”은 너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두려움이 사랑을 낳는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그가 없다는 것은 불안과 슬픔의 원인이다.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전혀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절망이다. 그는 닿을 수 없이 높은 곳에 있고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끊임없이 자신을 그와 비교하면서 슬픔을 느낀다. 어쩌다 갖는 소중한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고 헤어져 있는 시간은 느리다. 사랑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절망이든 감정이다. 풀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의 대변자다. 이런 모호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그를 생각한다. 그는 누구일까. 지금 무엇을 할까. 지난번 들었던 말은 진실인가. 무슨 의미일까. 다음번 만남에서는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생각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일상을 가로막으면 나는 이제 그만 잊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감정인가, 생각인가.
감정 논쟁
― 사랑은 감정인가 생각인가
감정을 인지 기능과 연결 짓는 뇌인지과학자 로버트 C. 솔로몬은 감정을 생각 혹은 생각과 흡사한 어떤 것으로 표현했다2004, 80. 만일 사랑이 가장 끈질긴 감정들이고 동시에 가장 끈질긴 생각들Enduring thoughts이라면 감정은 이성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은 이성을 위해 감정을 억압하라고 말했을까. 왜 데카르트의 이성에 스피노자는 감정으로 저항했고 칸트의 이성에 니체는 감성으로 반발했을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성을 감정보다 더 위에 놓고 감정을 공화국에서 추방하려 했다. 감정을 자극하는 시인은 철학자보다 열등했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은밀하게 추방된 시인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는 감정을 제거하려 하면 오히려 한꺼번에 폭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살살 달래서 윤리적인 방향으로 정화하길 원했고 그것이 잘 쓰인 극의 역할이라고 봤다. 그뿐 아니라 감정은 사회생활, 예절 교육, 정치적 논쟁, 그리고 행복 추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의 네 가지 요소를 인지 판단, 그리고 감각적, 행동적, 생리적인 요소들로 나눴는데 이것은 순서만 거꾸로 되었을 뿐 오늘날의 심리학이나 뇌과학 이론과 거의 일치한다. 뇌의 하부가 더 오래된 원조라고 믿는 진화론이나 현대 심리학은 뇌의 하부에서 상부로 오르는 뉴런들이 더 강력하다고 본다.
세월이 흘러도 감정과 이성의 논쟁은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플라톤보다는 덜했지만, 그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 사실 그의 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정을 몸과 영혼에 연결하여 일원론적 시각을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사람들은 그가 제시한 몸과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한층 더 밀고 나가 18세기 계몽주의 이래의 대표 철학자로서 대우했다. 이후 혁신적 이론가들은 언제나 그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전복함으로써 새 깃발을 올린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서구 이성중심주의의 주모자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감정을 몸과 연결하고 인지를 영혼과 연결하여 이원적 구조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영혼과의 경계선에 놓았다. 그리고 신기한 느낌, 사랑, 증오, 욕망, 기쁨, 그리고 슬픔이라는 여섯 가지 감정을 중시했다. 이상한 것은 두려움이라는 그 오래된 감정 대신 신기하고 이상하여 호기심이 생기는 느낌을 앞에 놓았다는 것이다. 알고자 하는 추구의 감정을 그가 맨 앞에 놓은 것은 오늘날 야크 판크세프가 주장하는 ‘추구 시스템Seeking System’을 감정의 제1순위로 놓은 것과 같아서 흥미롭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인지와 구별하지 않았다. 둘은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이자, 우리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생명의 근원인 신이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마음에서도 일어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몸에서도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몸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자세히 나눠 긴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욕망Desire이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느낌,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Wonder을 앞에 놓은 것과 비교된다. 욕망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자 생각이며,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욕망은 몸에서도 일어나고 마음에서도 일어난다. 욕망은 호기심보다 훨씬 더 넓고 본질에 더 가깝다. 데카르트의 이상한 것에 대한 느낌이 스피노자의 욕망보다 폭이 좁다는 것은 두 철학자 사이의 감정과 이성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여주어 흥미롭다.
스피노자의 감정 목록은 쾌감과 불쾌감으로 이어지는데 이 느낌은 오늘날 안정감 및 동요와 함께 정서Affect 혹은 기질이라 불린다. 정서는 아주 오래된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 동물에게도 있다. 신기한 호기심은 그다음에 오고 이어서 경멸, 사랑, 증오가 뒤따른다. 다마지오는 최근에 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여 주목받은 대표적인 뇌신경과학자인데 그가 1994년 선보인 책은 『데카르트의 오류』이고 2004년에 출간한 책은 『스피노자를 찾아서』이다. 데카르트로부터 등을 돌리고 대신 스피노자를 향하는 최근 뇌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추세를 암시하는 제목이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겠지만 나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뉴런의 흐름에서 감정과 생각의식 또는 인지를 포함은 그렇게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다시 사랑이 감정인가 아니면 생각인가라는 화두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인류 문화의 기원인 그리스 문화에서 욕망, 혹은 사랑Eros은 어떻게 정의되었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감정의 목록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증오와 이웃처럼 함께 튀어나와 눈길을 끈다. 훗날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와 타나토스라고 표현했다. 연인과 한 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에로스라면, 반대로 연인을 파괴하고픈 욕망이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라 부르고 한 짝으로 봤다. 대상과 한 몸이 되려면 대상을 파괴해야 가능하기에 에로스적 사랑은 순간적일 뿐 애초부터 살아서는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과 증오가 한 짝인 것을 알면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랑과 증오를 이웃으로 놓고 연민과 두려움, 분노, 수치심, 부러움 등을 감흥Pathê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시켰다.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끝날 때 관객이 느끼는 감흥인 연민은 오늘날의 공감과 비슷하다. 극중 인물의 감정과 한마음이 되었다가 결말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 것을 보면서 가련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연민이다. 동일시에서 거리를 두고 판단이 개입된 결과다. 연민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고귀한 운명의 추락을 보며 느끼는 인간의 운명과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가장 원시적이고 보편적이며 우리를 사로잡는 감흥이다. 원래 사냥을 하던 시절에는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을까, 굶어 죽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로 문명이 시작되던 그리스 시대의 두려움은 이보다 조금 더 사회적인 감정이 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신탁의 명령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신탁을 그대로 실천하는 길이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에서 관객은 신과 운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겸손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안도감을 느낀다. 두려움이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라면 수치심과 부러움은 인간만이 갖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며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대표적인 감정으로 놀라움, 호기심, 광적인 기쁨Rapture, 두려움, 노여움, 정욕, 탐욕 등을 꼽았다. 놀라움, 호기심, 두려움이 감정 서열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선행하는 철학자나 과학자와 다르지 않다. 광적인 기쁨, 노여움, 탐욕은 이들보다 비교적 늦게 나타난 감정이라 볼 수 있다. 동물에게는 광적인 기쁨이나 노여움, 탐욕이 없다. 남과 비교하여 아파트 크기를 키우거나 더 나은 지위를 탐하지 않는다. 힘에 의한 서열이 있을 뿐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타인을 의식하고 이에 따라 감정도 복잡해지며 다양해진다. 감정은 진화하기에 생물학적 현상이고 동시에 사회적 현상이다.
감정도
진화한다
두려움은 막연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데이비드 콘스탄2018에 따르면 두려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기에 추론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유아기에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의식이 발달하기 전 아기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 없다. 예를 들어 기저귀가 젖었을 때 아기가 칭얼거리는 것은 그것을 느껴서가 아니라 원시적 본능,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불쾌감을 어른에게 알리는 나름의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오직 엄마의 마음이 그런 징후를 느낌으로 해석하고 얼른 기저귀를 갈아주며 눈을 마주친다. 아이는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뇌 속에 내장된 물려받은 진화의 하드웨어를 개발하면서 사회화되고 의식이 발달한다. 문명의 발달로 두려움의 성향이 바뀌듯 원시적 본능이었던 두려움도 몸의 반응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진화한다.
심리학이나 뇌과학은 이런 현상에서 감정과 느낌을 구별한다. 사랑은 감정이면서 동시에 ‘필링’, 즉 느낌이라는 것이다. 감정과 느낌이 다르다고? 동물은 두려움을 느낄까? 불이 난 숲속에서 사슴이 도망치는 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처럼 느끼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몸의 반응이다. 생존을 위해 두려움이 아기에게 있듯이, 이는 동물에게 있는 가장 보편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낌’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오직 인간만이 느낀다. 이 부분은 쥐의 공포를 연구한 두려운 감정의 대가 조지프 르두를 소개할 때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지금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다시 돌아가자.
콘스탄의 조사에 따르면 질투는 두려움보다 늦게, 로마 시대가 돼서야 나온다. 질투는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의식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정에는 진화 과정에 따라 원시적인 기본 정서가 있고 의식이 진화되면서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새로운 차원의 감정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가장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다. 감정이 많을수록, 세분화될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며 대신 생존력도 높아진다.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소위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감정이 복잡하고 다양해서다. 2019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키 큰 네안데르탈인을 물리치고 키 작은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유아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유아기란 몸의 존재에서 의식의 존재로 조금씩 눈을 떠가는 과정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다가 나를 의식하고 타인을 의식하면서 눈치가 빤해진다.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시작하면서 타인을 의식하고 언어를 배운다. 의식은 자의식과 같은 말이다. 동물과 달리 사회적 인간이 되는 길을 배우고 학습하는 기간이 길다는 것은 배움과 추구의 능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고 그만큼 진화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콘스탄에 따르면 그리스 시대는 아직 질투라는 감정이 없던 때다. 질투는 신화 속의 신들만이 가진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에로스와 필리아Philia로 구분된다. 열정적인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기에 연인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시간이 지나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변덕스럽다. 한 나라를 패망시킬 정도로 변덕스럽다.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의 미녀 헬렌이 그녀에게 반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도망친 것에서 비롯되었다. 헬렌은 물론 유부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에로스적 욕망의 기준에 따라 신랑감을 그녀 스스로 선택하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메넬라오스를 선택했고 시간이 흘러 똑같은 기준을 잣대로 남편을 버리고는 파리스와 도망친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산들바람The breezes of Aphrodite”처럼 변덕스럽고 허망하지만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갈 정도로 강력하다. 자식을 낳아 생명을 연장하려는 생존본능이기 때문이다.
필리아는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필리아는 친구사이의 우정,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처럼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에로스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이상적인 사랑이다. 변덕스러움이 덜하기 때문이다. 하등 동물로 갈수록 필리아는 약하다. 아가페는 더욱 약하다. 가장 넓고 높은 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동물로부터 진화한 인간에게는 동물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세 가지 사랑이 공존한다. 에로스는 본능이고 필리아와 아가페는 사회적 감정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야 이상적인 사랑이 된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이 오래가려면 에로스만으로는 안 되고 필리아만으로도 안 된다. 치열한 열정으로 시작하여 때로는 우정처럼 함께 다투면서도 이해하고, 부모의 사랑처럼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가장 높은 신의 사랑을 언젠가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물론 가장 밑바탕에 있으면서 가장 오래된 에로스의 위력이 녹록지 않기에 이런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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