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골
멀리 차들이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는 거고 노란 버스가 지나가면 꼭 노란 차가 지나간다고 중얼거린다 그냥 중얼거린다, 중얼거리고는 중얼거렸구나 생각한다 또 생각하는구나 생각하다보면
돌 속에는 돌이 있고 그 속엔 또 돌이 있다는 이야기 같다 중얼거리는 것이 꼭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일 같다, 속삭이는 일이 돌에게서 돌을 벗겨주고 물에게서 물을 말려주는 일인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깔고 누운 자는 자신이다
누구나 자신의 발자국을 밟고 서는 자는 자신이다,
그렇지만
너무 늦게까지 자지는 마
어둠은
꿈이 현실 속으로 잠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국경수비대 같은 것인데,
잠든 채 아침이 오면
위험해
그렇지만, 내 꿈속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오늘은 재활용 분리수거하는 날이고 분리수거장 한쪽에 쌓인 박스들에 멋진 날개를 달아주려고 준비중이다
네가 카디건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가서 구부정한 옷걸이를 식탁에 앉히고 밥을 먹는다
비도 오지 않는데, 빗소리 참 좋다 말하며 벗소리처럼 끓는 찌개 속에 숟가락을 담근다
구름 제조법
날씨에게도 집이 있어서,
부엌이 있고
어느 저녁엔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친다, 그것은 울 나간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바람의 언 손이 하는 일. 문밖에 갈색 가죽을 덧댄 신발을 벗어놓고
젖은 발이 하는 일.
그 발은 구름의 발,
비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생활은 또 불길 지나간 들판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이어서,
바닥에 닿자마자 흰 연기를 지피며
지져진다.
무엇일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지나간다는 것은. 입김의 흰 목덜미를 불며
난로를 켜고.
주전자에 받아 물을 올리고 조용히 구름을 만든다. 오늘은 흐림. 아니 비. 이렇게 불을 지피면 물속에 잠길 수도 있다. 물이 끓으면, 불 속을 헤엄칠 수도 있다.
불을 끄면,
창밖으로 검은 돌고래떼가 느리게 지나가는
밤.
무엇일까?
어떤 이별도 남아 있지 않은 인연에게
남은 것은.
밤은 모든 거리를 지우고 모든 벽을 허물고 사람 옆에 사람을 눕혀 오로지 꿈속의 얼굴만 보여주는데,
물속에서 빗방울을 건져내기 위해서 끓고 있는 주전자처럼
누가 운다.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오는
비.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물의 얼룩을 끝까지 품고 있어서, 주전자는 수요일 오후의 분리수거장 부대 속으로 무심하게 던져진다.
책
종이 위로 생각이 지나갔다 그걸 읽으려고 형광등이 빗소리처럼 흰 목을
그러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요하게
늘어뜨렸지만
생각은 이미 나를 지나가버렸고 지금은 종이와 손가락과 툭 끊어진 채
하얗게 굴러다니는 머리의 밤, 불을 끈다
어둠이
생각을 감싼 표지라면
제목은 지나갔다
제목 없는 표지면 어떤가, 아무리 찢겨도 맨 앞 장이 표지겠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찢어내고 찢어내도 그대로인
생각처럼
비,
젖는 일에는 입구가 없어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아 있다, 죽은 자를 깨웠다가 다시 죽인다
찢겨나간 페이지가 또 한 권씩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
그러니까
무수한 낙엽들이 한 권씩 책의 무게로 떨어지고 있다 무수한 바닥을 찢으며
비,
가스불로 끓이는 것 같은 비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비,
짜질 줄도 모르고
바닥에 달라붙어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인 줄도 모르고 꿈을
꿈속에서. 당신은 내 앞에서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어요 듣지 못한 채
비행기가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나를 묻는 당신
맞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당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바람이 흔들어보는 십자가,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불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군요 은총에선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여러 칸으로 나눠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었는데
다음 버스에도 같은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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