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조선 최고의 다독가, 홍명희
거무튀튀한 재생지에 구수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책이 있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시대 민중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다루어 역사소설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 《임꺽정林巨正》이다. 지은이는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일컫는 벽초 홍명희洪命憙, 1888~1968다. 중국 문학을 전문적으로 번역했던 양건식梁建植, 1889~1944에 따르면 홍명희는 조선 문단에서 손꼽히는 다독가였다. 그의 책 읽기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았고 쏟아져 나오는 잡지의 글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을 정도로 매우 부지런했다.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才로 주목받았던 홍명희의 삶과 독서 여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1905년 봄, 서울그 당시는 한성이라고 불렀다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충북 괴산으로 돌아온 홍명희는 모든 게 갑갑했다. 어렸을 때는 “괴산 외에 더 좋은 곳이 없고 우리 집 외에 더 좋은 집이 없는 줄로” 알았던 소년에게 농촌 마을의 정취는 지겨움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하게 지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 홍범식洪範植, 1971~1910은 아들에게 동양 고전인 《춘추春秋》 사전四傳을 읽게 했다. 홍명희는 중국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를 진저리가 날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일종의 궁전 연대기인 《춘추》가 유교 경전이 된 건 공자가 필삭을 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춘추》는 공자의 정치 이념이 담겨 있는 책이다. 문제는 일종의 해석서인 전傳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난해하다는 데 있다. 홍명희가 읽었다고 하는 사전은 《춘추》의 대표적인 해석서인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과 아울러 《호씨전胡氏傳》을 말한다. 보통 한학 공부는 《좌씨전》 정도에서 그쳤다고 하니 홍명희는 상당히 깊이 있는 경전 공부를 한 셈이다.
어느 날 한 일본인 부부가 양잠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마을에 찾아왔다. 기술 전수를 마치고 갈 무렵 홍명희는 일본인 부부를 초청하여 일어 회화를 연습했다. 한성에서 일본어를 공부했으나 실제 회화를 하긴 이때가 처음이었다. 급기야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갑갑한 괴산에 머물러 있느니 도쿄에 가서 공부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외로 부친은 “잠깐 구경만 하고 올 바에 몇 해 동안 공부를 해오라”고 선뜻 허락해주었다. 그 길로 홍명희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도쿄로 향했다. 그의 나이 만 18세가 되던 1906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선 그는 도요東洋상업학교 예과를 다녔다.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교과서 공부에 몰두하던 나날이었다. 1년이 지나 다이세이大成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 후 우연찮게 헌책방을 방문하는 일이 생겼다. 거기서 홍명희는 3권의 책을 고르면서 일본문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당시 일본은 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소재로 삼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고백하는 경향이 강한 자연주의 문학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가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책인 《어디로何処へ》1908는 자연주의 문학을 이끌어가고 있던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1879~1962의 단편집이었다. 그 밖에도 홍명희는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입지를 굳힌 시마자키 도손과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1871~1930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당시 자연주의 문학은 풍기문란을 이유로 발매 금지되는 경우가 많아서 홍명희는 전문 서적상인 책사를 두루 찾아다니며 비싼 값으로 구해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홍명희가 자연주의 문학에만 심취했던 건 아니었다. 자연주의 문학과 다른 길을 걷고 있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작품을 거의 다 읽기까지 했다. 홍명희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새로운 도덕에 대한 탐구’ 내지 ‘일본 문학의 신국면을 열었던 작가’로 평가했다.
헌책방 방문 이후 홍명희는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표지 디자인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책 선정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홍명희는 책에 대한 안목이 생기기까지 표지의 의장과 제목의 글자체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밝혔다. 심지어 내용이 읽을 만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홍명희는 책의 물성 자체를 탐한 독서가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다독가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홍명희의 독서는 완독完讀과 남독濫讀의 책 읽기였다. 일단 그는 책을 한번 집어 들었으면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완독을 지향했다. 중간에 필요 없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을 다 읽기까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재미있는 책은 재미있는 대로, 재미없는 책은 다른 재미있는 책을 얼른 읽기 위해 악을 쓰고 빨리 보았다. 시마자키 도손의 첫 번째 시집인 《약채집若菜集》1897은 그가 끝까지 읽지 못한 유일한 책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던 그로서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책을 읽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밤새 책 읽기’와 ‘화장실 독서’였다. 문제는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으니 학교생활이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학교 측에서 퇴학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결석이 잦았다. 그런데 또 머리가 비상해서 시험공부를 며칠 동안 바짝 하면 성적이 좋아졌다. 학교생활은 불량했어도 시험 성적은 좋았던 얄미운 학생이었다.
화장실 독서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이대용이라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쓸 때였다. 어느 날 저녁에 이대용의 지인들이 자취방을 찾아왔다. 서점에서 사둔 책을 이제 막 읽기 시작한 홍명희는 자신도 아는 사람들인지라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책이 보고 싶어 좀이 쑤시는데,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슬그머니 책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조금만 읽자, 조금만 읽자 하다가 그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지인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있던 이대용은 화장실에서 책 하나를 다 읽은 홍명희를 놀려댔다. 책을 읽을 때 그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남독은 ‘닥치는 대로 아무 책이나 읽는 독서’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독서법이다. 홍명희는 다독多讀을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독서법을 남독으로 소개했다. 다독가로서의 진면목은 《삼천리》라는 잡지에 남긴 자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루소의 《참회록》1781, 1788을 본받아 과거를 적나라하게 고백할지, 아니면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1888를 흉내 내어 철인적 기염을 토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또한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1842~1921, 트로츠키Leon Trotsky, 1877~1940, 가타야마 센片山潛, 1859~1933, 오스키 사카에大杉栄, 1885~1923 등을 거론하며 이들의 자서전을 읽어보았다고 밝혔다.
《조선일보》에 수록한 〈문학에 반영된 전쟁〉도 다독가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글이다. 전쟁과 문학의 관계를 다룬 이 글은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이스 모건Lewis Henry Morgan, 1818~1881이 쓴 《고대사회》1877를 인용하며 전쟁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의 골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문학이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을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전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독일의 반전소설로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1871~1950의 《애국자》, 베른하르트 켈러만Bernhard kellermann, 1879~1951의 《11월 9일》,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1893~1939의 《절름발이》, 루트비히 렌Ludwig Renn, 1889~1979의 《전쟁》, 에리히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등을 언급했다. 홍명희의 다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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