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쌍둥이 타워가 무너지던 날
2001년 9월 11일. 이 날을 회상하는 모든 미국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화염에 휩싸인 쌍둥이 타워, 펜타곤을 향해 돌진하다 추락하는 비행기, 용맹하게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유나이티드항공 93기의 승객들, 재와 잔해가 뒤섞인 거대한 연기 기둥 사이로 붕괴하는 건물들…….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으로 기록된 이 날,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적으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깊은 충격에 빠졌다.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미국과의 연대를 표명했다. 민간인 공격과 대량 살상이 야기한 충격은 국경을 넘어 경쟁 관계에 있던 국가들까지 하나로 이어 주었다.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수준의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세계라면 제 아무리 평화로운 국가라 한들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에 조용히 눈 감고 있을 국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미국 사회는 즉시 계급, 정당, 종교, 인종, 민족을 가리지 않고 단결했다. 미국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다.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 테러리스트들과 그 교사자들을 응징하는 정의,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정의 그리고 미국을 위한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데에도 동의했다.
9.11 테러의 희생자들은 참혹하게 죽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충돌이나 추락과 동시에 즉사했고, 펜타곤 건물과 쌍둥이 타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뜨거운 연기를 흡입해 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압사했다. 소방관이나 경찰관과 같이 건물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용감한 영웅들도 있었다. 유가족들에게 희생자들의 사망 원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9.11 희생자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들의 부모, 자녀, 친척, 친구들의 일상에 지울 수 없는 상실감을 남겼다. 저녁 식탁의 텅 빈 자리, 가족 모임에서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 더 이상 축하할 수 없는 생일과 각종 기념일은 온전히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입은 피해는 정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손해를 야기했다. 9.11 희생자들의 피부양자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매달 내야 하는 공과금과 학비, 자녀 양육 및 부모 봉양, 퇴직 후의 삶에 대비한 저축 등에 돈을 대 주는 사람을 잃은 것이기도 했다. 돈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세계에서 피부양자들에게 닥친 이러한 손해는 정서적 문제임과 동시에 재정적 문제였다. 사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네 명의 가상 인물 릭, 짐, 애니타, 서배스천을 설정하여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릭은 3세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자랐다. 운동신경을 타고난 릭과 그의 형은 고등학생 시절 학교 야구팀에서 주목 받는 선수이자 유도 유단자였다. 경험 많고 노련한 소방관이었던 릭은 9.11 현장에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진 날, 비번이었음에도 소방서로 출근했고 소방차에 올라타 로어 맨해튼으로 향했다. 그의 약혼녀 수지가 그해 12월에 멕시코 칸쿤에서 올리기로 예정된 결혼식을 알리는 초청장을 발송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형제들과는 부모님의 마흔 번째 결혼기념일 선물로 부모님 집의 욕실을 리모델링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실하고 유능한 데다 어느 정도 운도 좋았던 짐은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그가 다트머스 대학교 MBA에 입학했을 때, 골드만삭스 인턴 프로그램에 합격했을 때, 그의 투자 회사에 두 명뿐인 흑인 대표 파트너 중 한 명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소수자 우대 정책’의 혜택을 봤다고 수군댔다. 짐은 그렇게 수군대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두 딸을 미국에서 가장 좋은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고, 피아노 레슨을 시키고, 마르티니크〔카리브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섬〕에 있는 여름 별장에 갔을 때 꽃꽂이를 배울 수 있게 하려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매년 몇 백만 달러에 달하는 보너스를 받던 짐은 48세에 이미 딸들의 사립학교, 가정교사, 대학 등록금을 지불하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저금해 두었다. 또 일찌감치 유언장을 통해 마이애미주에 있는 그의 콘도는 작은 딸이, 마르티니크에 있는 별장은 큰 딸이, 네 가족이 사는 브루클린 하이츠의 붉은 벽돌집은 부인이 상속받도록 정해 둔 상태였다.
인도네시아 출신인 애니타는 6년 전 학생 비자로 미국에 왔다. 그녀의 부모는 애니타가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와 결혼해 뉴저지에서 큰 집을 마련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애니타가 아이 셋을 낳으면 미국으로 건너와 손자들을 키워 주는 미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애니타는 디저트 만드는 일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됐고 웨스트빌리지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미국인 룸메이트인 애슐리와 사랑에 빠졌다. 2학년을 마치고 컬럼비아를 자퇴한 그녀는 〔쌍둥이 타워 중 하나인〕 노스 타워에 있는 한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경영자가 되려던 계획을 버리고 진로를 바꾼 그녀는 주말마다 유명 요리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았다. 애니타와 애슐리는 요리 학교를 졸업한 후 피츠버그에 있는 애슐리의 고향에서 ‘A&A 케이크 전문점’이라는 이름의 작은 가게를 차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 어밀리아의 기쁨이었던 서배스천은 사랑스러운 여섯 살 아이였다. 9월 11일 아침에 보스턴에서 비행기에 오른 두 사람은 로스앤젤레스의 벨에어 컨트리클럽에서 일하는 서배스천의 아빠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서배스천은 축구와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어떤 때는 결승골을 넣는 축구 선수 호날두를 흉내 냈고, 어떤 때는 쪼그리고 앉아 강속구를 잡아내는 포수 퍼지 로드리게스를 흉내 냈다. 소속된 어린이 리그에서 스타 스트라이커였던 서배스천은 같은 팀 친구가 골을 넣을 때마다 누구보다 큰 소리로 “고오오올!”이라고 외치며 즐거워했다.
나이, 성, 인종, 교육 수준, 국적, 재산 규모가 모두 다른 네 사람의 삶은 9.11이라는 사건으로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살아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테러 공격의 희생양이 되어 같은 날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릭은 결혼은 물론 부모님 집의 욕실 수리도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었고, 짐은 퇴직 이후의 삶은커녕 두 딸이 성장하는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애니타는 요리 학교를 졸업할 수도 디저트 가게를 차릴 수도 없게 되었고, 서배스천은 커서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일곱 번째 생일도 맞을 수 없게 되었다. 네 사람 모두 다 펼치지 못한 꿈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미래를 위해 세워 둔 계획은 앞으로 실현될 수 없게 되었고,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
9월 11일 테러 공격 직후 미국은 서둘러 단호한 대응에 나섰다. 온 나라가 테러의 원인을 이야기하고 위로를 구하고 국가의 보호와 복수를 요구하는 중에 국회는 ‘애국자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시작되었고 주 방위군이 소집되었다. 군인 가족들은 9.11이 야기한 단기적 영향을 체감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자살 폭탄 테러범들을 피해 다니며 아프가니스탄, (나중에는) 이라크에서 발생한 소요를 진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국회는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명명된 모호한 이름의 전쟁에 수조 달러를 쏟아 부었다.
뉴욕, 워싱턴 DC, 펜실베이니아의 사고 현장 근처에 살던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변화를 경험했다. 대기가 오염되고 출입금지 지역이 생겼으며 군인들과 수사관, 정부 관리, 기자, 경찰이 상존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날의 사건을 계속 상기하며 살아야 했다.
물론 9.11 희생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현장 근처에 살지도 않았으며, 군인을 지인으로 두지 않은 미국인도 수백 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곧 9.11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주식 시장도 몇 달 안에 회복되었다. 실업률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그러한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테러 사건과 자국이 진행 중인 전쟁을 아주 명확하게 상기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공항 보안 조치였다.
한편 9.11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은 지울 수 없는 정서적, 경제적 결핍을 경험했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고 영원히 그리워하게 할 수밖에 없는 정서적 결핍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가족이 잃게 된 수입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재정적 자원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 희생자 대다수가 돈을 벌어 가계소득에 일조하고 각종 경비를 대고 은퇴 이후의 삶에 대비해 저축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어린 자녀나 노년의 가족 구성원, 다른 부양가족을 돌보는 무보수 노동을 하던 희생자들도 있었다. 희생자들 중에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훗날 유급이든 무급이든 노동자가 될 터였다.
역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살상을 야기한 9.11 테러는 그 파괴력만큼이나 전례 없는 연방 정부의 조치를 가져왔다.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나 1998년 주 케냐·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93년 첫 번째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처럼 9.11 이전에도 테러 공격은 있었지만 국가 차원의 보상 기금 창립이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거에 있었던 테러 사건에서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사망자들이 있었으나, 당시 정부가 나서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지는 않았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과거의 사건들은 미국 정부가 희생자들의 생명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로 귀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정부가 9.11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달랐다. 침체된 항공업계와 정부 관리들 간의 공조로 ‘항공운송 안전 및 시스템 안전화법’이 탄생했다. 신속하게 국회를 통과하여 2001년 9월 22일에 서명된 이 법은 도산 직전인 항공업계를 지원하고 9.11 희생자들의 피부양자를 포함한 청구인들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데 각각 수십 억 달러를 책정했다. 이 기금의 첫 번째 목적은 기업의 파산을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상금을 수령한 가족들은 항공사, 공항, 보안 회사, 세계무역센터 등 테러 공격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업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보상금 제안을 수용하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 국회는 항공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60억 달러로 제한했고 지급금은 불법행위법에서 적용하는 기준을 반영하도록 했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존 애슈크로프트는 9.11 희생자 보상 기금의 특별 단장으로 케니스 파인버그를 임명했다. 파인버그는 전직 연방 검사로 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의 법사위원회 특별 자문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있었던 고엽제 소송을 합의로 마무리 지으면서 미국 최고의 중재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파인버그에게 주어진 과업은 사망이나 부상이 야기한 경제적 또는 비경제적 비용의 값을 매기는 것, 즉 가격표를 만드는 일이었다.
파인버그가 고안한 산출 방식은 비경제적 가치와 피부양자 가치, 경제적 가치를 합산한 것이었다. 비경제적 가치는 모든 희생자에게 25만 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이 책정되었다. 피부양자 가치는 모든 피부양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희생자에게 배우자가 있으면 보상금에 10만 달러가 추가되었고, 피부양자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10만 달러씩 추가되었다. 경제적 가치는 희생자의 소득에 기반하여 책정되었기에 결과 값은 천차만별이었다. 이 가치는 희생자의 평생 기대소득, 각종 수당 및 기타 혜택 등을 계산한 뒤 희생자의 실효세율에 맞추어 조정해 얻은 값이었다. 이 계산법에는 희생자의 나이, 정년까지 남은 햇수, 기대 소득 증가분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었다. 파인버그는 초고소득자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도록 예상 연간 소득의 상한선을 23만 1000달러로 제한했다. 그렇게 산출된 금액은 다른 곳에서 지급될 생명보험, 연금 기금, 사망 보험금과 같은 기타 보상금의 총액을 제한 뒤 최종 지급액으로 결정되었다.
비경제적 가치, 피부양자 가치, 경제적 가치를 더한 총액은 의료비와 장례비에 기초하여 상향 조정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계산에 의해 최종 결정된 보상금액을 희생자 가족들에게 제시하면 가족들은 보상금을 수령할지 재심을 청구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파인버그가 그의 저서 『생명의 가치는 얼마인가What is Life Worth?』에서 직접 밝힌 바와 같이 2004년 6월에 보상금 지급이 완료될 무렵 희생자 가족의 97퍼센트가 보상금 수령에 동의했으며 그 총액은 70억 달러희생자 1인 평균 지급액 약 2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보상금의 최저액과 최고액의 차이는 매우 컸다. 가장 적게 받은 가족들의 보상금이 25만 달러인 데 반해 가장 많이 받은 가족들의 보상금은 700만 달러가 넘었다. 어떤 희생자들에게는 다른 희생자들 생명의 거의 30배에 달하는 가치가 매겨졌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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