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웰컴 투 갱년기
― 갱년기와 ‘더불어’ 살다
‘월경 끝’ 그 이상
〈메노포즈menopause〉라는 뮤지컬이 있다. 블루밍데일 백화점 란제리 세일에서 네 명의 중년 여성들이 만난다. 검정색 레이스 브래지어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이들은 자신들이 서로 얼마나 많은 경험과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기억력 감퇴, 발열, 홍조, 수면 중 과도하게 땀을 흘리는 도한증, 늘어 가는 주름, 성형 수술, 호르몬, 불면증, 성욕 감퇴, 성욕 증가 등등.
나는 〈메노포즈〉를 보지 않았다. 〈메노포즈〉에 대한 이 기본 정보는 구글이 제공하는 길고 상세한 설명의 앞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2001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2006년 봄에 종연할 때까지 1,50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세웠다는 이 뮤지컬은 한국에서도 2005년 첫 공연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시차를 두고 꾸준히 무대에 올려졌다. 그런데도 나는 이 뮤지컬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는 곳 근처 육교 위에 〈메노포즈〉를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한 번도 이 뮤지컬에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맘마미아〉의 경우 뮤지컬과 영화 모두 일찌감치 챙겨 보고 즐거워했던 것에 비하면 의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메노포즈’는 내게 상당히 생리(학)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문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여자로서 개인적으로 나와 관련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이미 40대 초반부터 이런저런 신체 증상이 있었고,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갱년기’의 시작이라고, 갱년기는 수년, 아니 십수 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들었지만 내게 ‘메노포즈’는 외부의 무엇이었다. 그것도 사회문화나 정치경제와 무관한 어떤 외부, 그래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없는 임의의 어떤 외부 말이다.
그러다가 벼락을 맞듯이 ‘진짜’ 메노포즈에 강타당하는 일이 생겨버렸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 다음은 애써 모른 체했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근대식 훈육에 익숙한 사람의 오만!) 그 다음으로는 깊은 원망과 절망의 수렁에 빠졌고 결국 ‘더불어’에 희망을 거는 것으로 타협했다. 뭐랄까, ‘인생의 본때를 맛본다’는 것이 여성 호르몬에서 예기치 않은 국면에 맞닥뜨렸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 어떻게든 ‘메노포즈와 더불어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스스로 격려하기까지, 짧지 않은 ‘이상하고 낯선, 너무나 납득하기 힘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다. 조금씩 포기와 적응을 반복하며 나는 지금까지 메노포즈와 함께 살고 있다. 60대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격렬한 증상 때문에 뒤늦게 호르몬 약을 먹어보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40대 초반의 산부인과 의사는 카랑카랑하고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그 나이까지 갱년기 증상이 있다는 건 사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라며 내 고충에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보다 다양하다. 드물지만 나처럼 한번 시작된 갱년기를 졸업하지 못하고 여전히 증상을 견디는 여자들을 만난다. 갱년기 증상과 더불어 살면서 나는 겸손의 생리학적 측면을 배우고 있다.
월경menstruation과 중지pause가 합쳐진 말인 메노포즈menopause는 문자 그대로 더는 월경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서구 여성학자 중에는 메노포즈를 ‘남자에게서 자유로워지다’로 의미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메노포즈의 한국어 용법이 ‘완경’과 ‘갱년기’ 둘 다를 포함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메노포즈는 단순히 ‘월경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 초반에 나열한 각종 증상들이 메노포즈의 외연을 형성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 여기에 불안, 자기와의 갈등, 우울 혹은 초조까지 덧붙여진다. 에스트로겐 호르몬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의 작용에 따른 결과지만, 메노포즈는 신체적·생리적 상태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복합 ‘현상’이다. 현상은 해석을 요구하고 해석은 담론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완경 - 여성 호르몬 - 갱년기라는 이 난해하고 복합적인 현상에 대한 해석이나 담론은 어떠한가.
똑같은 갱년기는 없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 영어권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40~50대 중년 여성들이 백 퍼센트 공감하고 환호했다는 뮤지컬 〈메노포즈〉의 홍보가 강조하는 것은 단연코 ‘폐경’이 아니라 ‘완경’으로서 메노포즈다. 월경이 끝났다고 여성으로서 끝이 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여성으로, 완전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더는 월경을 하지 않으니 이제 여자로서 삶도 끝이다’라는 식의 어법이 만연하다 보니 그에 대한 역동적 저항 내지는 적극적 긍정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함께 손뼉을 치고 해방감을 느끼기엔 이 말은 표피적 선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들린다. 한 달에 한 번 ‘마법에 걸리면서’ 사랑하는 짝과 DNA가 같은 종을 재생산하고, 또 더는 종을 재생산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짝을 유혹할 수 있는 성적 매력을 간직하던 여자에서 탈마법의 건조하고 황폐한 사막으로 밀려난 여자라고요? 무슨 말씀! 그건 당신들의 뻔하고 뻔뻔한 판타지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 우리는 여자로서 이제부터 완전히 원숙한 삶을 사는 것이랍니다! 가부장제 문화나 남성 판타지를 반영한 ‘폐경閉經’이라는 명명을 거부하고‘완경完經’이라는 새로운 기호를 불러낸 것은 매우 창발적이고 참신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문화 정치학 측면에서 진행된 이 운동은 완경의 심리적·생리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너무 앞서간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한다. 갱년기 증상에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은 난포 자극 호르몬과 황체 형성 호르몬, 그리고 성선性腺 자극 호르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호르몬들은 번식과 양육에 헌신하라는 자연의 명령에 따라 강하게, 약하게 분비되거나 멈춘다. 그래서 월경 전 증후군과 완경기 증후군은 하나의 커다란 연관성 속에 놓여 있다. 여성 건강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완경기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엄마 역할을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완경기를 경험하는 여성의 심리적· 생리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당신은 모든 것 ― 특히 사람 ― 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싶은 생리적 욕구에 휩싸인다. 그 결과 대부분의 여성들이 완경기에 느끼는 공통적인 희망 사항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것과, 혼란과 요구 사항에서 벗어나 평화와 고요함을 맛보고 싶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역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력은 완경기 여성의 열정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이나 평화와 고요함을 향한 욕구, 혹은 생식 의무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에서 열정과 창조력을 불태우는 자유는 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증상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산부인과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매번 2~3분에 지나지 않는 진료의 끝은 몇 종류의 호르몬 약 소개와 먹을지 말지 ‘선택’하라는 것이 조언 아닌 조언이었다. 그때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호르몬 변화에서 비롯되는 각종 증상에 의료과학은 과연 얼마나 진지하고도 책임 있게 관심을 기울이는지, 여성들 각자가 겪는 갱년기 증상은 또 얼마나 같으면서도 다른지 등에 대해 과연 여성주의는 얼마나 충분히 깊이 있고 세밀하게 탐색하고 있는지? 나는 의사들이 가르쳐주지 않고 페미니즘이 답해주지 않는 난제에 부딪혀 메노포즈와 호르몬, 그리고 몸의 변화가 맺는 관계를 어떻게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책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지만, 호르몬의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중층적이었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 난포 자극 호르몬과 황체 형성 호르몬, 그리고 성선 자극 호르몬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극하고 자극받는 것처럼 우리 몸 안의 호르몬들은 서로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부족을 채우면 그것은 또 다른 하나에 영향을 끼친다. 부족을 채우겠다고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공책에 필기까지 해 가며 공부한 결과 얻은 중요한 사실 하나는 호르몬들은 일종의 오케스트라라는 것이다. 각각의 호르몬이 서로 맞추어 조율하지 않으면 전체로서 음악은 삑삑거린다. 호르몬 오케스트라의 통합적 형태와 움직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얻는 개별 호르몬에 대한 지식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성주의 관점이 투철한 전문가를 기다린다. 그가 여성의 완경기와 관련해 호르몬 세계의 ‘오묘한’ 구조와 통합적 작동 방식을 알기 쉽게, 모든 여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주길!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