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배정 개꿀꿀
‘봤지? 지금 나 봤지? 어떡해! 나 어쩌면 좋아!’
나는 아람이와 병희를 번갈아 쳐다보며 양손 검지로 엑스 자를 지어 보였다. 온몸으로 전하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뒤돌아 나를 보던 아람이와 병희의 표정이 묘했다. 동정하는 건지 어떤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자이로드롭을 탄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언제나 그랬듯 새 학년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나는 불안감이 좀 많은 편이다.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기도? 당연히 했다.
저는 혈액형이 O형인데요, 성격은 완전 트리플 A형이거든요. 아시죠? 얼마나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인지. 반 배정 폭탄 맞으면 저 죽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기도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블로그에 썼다. 세상의 신들은 나의 기도를 일부 들어주었다. 종업식하는 날 확인했다. 미소와 설아는 각자 다른 반이 되었지만, 나와 병희, 아람이는 반이 같았다. 우리 다섯 모두 한 반이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반 편성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람이, 병희와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건 행운이다.
지난주부터는 커뮤니티마다 반 배정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왔다. 며칠 전 베스트에 올라간 글이다.
지금부터 날 따라 해 봐. 반 배정 개꿀꿀! 적고 가라. 다들 반 배정 대박 나자!
작년 주문은 ‘헷꿀꿀’이었는데, 올해는 ‘개꿀꿀’로 바뀌었다. 여기에 2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나도 그 글에 추천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댓글도 달았다.
└ 반 배정 개꿀꿀! 대박 나기를!
혹시 몰라서 어젯밤에 댓글을 하나 더 달았다.
└ 반 배정 헷꿀꿀!
아람이, 병희랑 같은 반이 된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만 기도가 더 필요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완전 이상한 담임이 걸릴지도 모르고, 내가 엄청 싫어하는 애들이 우리 반에 우르르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자칫하면 1년 내내 납작 엎으려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자! 짝하고 인사부터 나누자.”
담임이 말했다. 기도의 효험인지 담임은 괜찮은 분을 만났다. 작년에도 2학년 국어를 맡았는데, 선배들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했다.
“안녕.”
짝이 말했다.
“……안녕.”
나도 말했다. 짝과 눈이 마주쳤다. 또 한 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 노은유! 나의 짝이 노은유라니. 병희와 아람이는 자기 짝과 인사하느라 더 이상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담임의 말들이 귀 바깥에서 윙윙 맴돌았다. 임시 반장, 또 2학년 담임, 이런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렸지만 마음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저 아찔했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어떻게 버티나.
그때 내 앞에 앉은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김시후다. 작년에 아람이랑 같은 반이었던 아이.
“선생님! 자리 언제 바꿔요?”
어라! 이건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오잉? 넌 내가 마음에 안 드냐?”
시후 짝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에이,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시후가 자기 짝을 보고 활짝 웃었다. 짝도 같이 웃었다.
“선생님! 이 자리로 쭉 가는 건가요? 아님 한 달 단위로 바꾸실 건가요?”
시후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담임이 안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그건 말이지, 아직 생각 중. 한 달이 좋을지 한 학기가 좋을지.”
그때 아람이가 손을 들었다.
“금요일은 마음대로 앉으면 안 되나요? 마음에 드는 친구랑 앉고 싶은 날도 있잖아요.”
그렇지. 역시 아람이가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병희랑 우리 셋이 돌아가며 한 번씩 앉아야 해. 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담임을 쳐다보았다.
“안 돼!”
담임의 표정은 단호했다. 어쩔까나! 앞으로 한 달, 재수없으면 한 학기 동안 나는 죽었다!
생각해 보면 죽을 정도의 일은 아니다. 싫은 아이가 짝이 되었다고 죽는다면 세상에 살아 있을 중학생이 몇이나 될까?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아!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아이는 그냥 싫은 아이가 아니고 노은유다, 노은유!
나에게는 친구가 정말 중요하다. 엄마만큼 중요하다. 아람이, 병희, 미소, 설아 그리고 나. 우리는 친구다. ‘다섯 손가락’ 단톡방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은따를 겪었고, 6학년 때도 잠시 은따였다. 그런 뒤에 이 친구들을 만났다. 이 친구들이 없는 나의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 다섯 손가락이 선정한 ‘시민중 밉상’ 명단이 있다. 그 1위는 황효정이고, 2위가 바로 노은유다. 3위부터는 그때그때 자주 바뀐다.
효정이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엄청 많다. 왜냐? 선생님들한테 눈웃음친다. 남자애들한테만 친한 척한다. 모범생도 아니면서 치마를 길게 입는다. 존재감 과시하려고 큰 목소리로 말한다. 종종 귀여운 척도 한다. 한마디로 재수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효정이는 선생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눈웃음친다. 원래 눈이 웃는 사람이 있는데 효정이가 그렇다. 남자애들한테만 친한 척하는 거? 이건 합리적 의심을 할 만하다. 효정이는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근데 남자애들이 효정이만 마주치면 바보처럼 헤벌쭉 웃으면서 먼저 말 거는 것 같던데. 교복 치마 길이 수선하지 않고 그냥 입고 다니는 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사항이니 할 말이 없다. 패션 전문가들은 나처럼 다리 짧은 사람은 미니스커트를 입으라고 강조하지만 나는 싫다. 허벅지를 드러내면 짧은 다리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존재감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 효정이는 원래 목소리가 걸걸한 편이다.
해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효정이는 거론한 이유 때문에 미움받는 게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효정이가 출중하게 예뻐서다.
예쁘다고 다 공공의 적이 되는 건 아니다. 예뻐도 친구들한테 인기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격 좋고 털털하고 ‘나 예쁜 척 절대 안 해.’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바로 ‘따’당한다. 은따든 왕따든.
효정이는 털털하긴 하지만 애매하게 털털해서 매의 눈보다 날카로운 아이들의 촉수에 딱 걸렸다. 자기가 예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은 말한다. 교복 치마를 길게 입는 거. 그거 자신감이거든. 어쨌든 튀니까. 약간의 털털함? 그것도 연출이야.
어쨌거나 황효정은 콤플렉스가 없는 아이 같다. 누구 눈치를 보거나 조심하는 법도 없다. 그래서 나도 황효정이 싫다. 밉상 1위가 우리 반이 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별로 예쁘지도 않은 노은유는 왜 밉상 2위에 랭크되었을까? 영어 발음이 좋아서?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온 은유를 보고 ‘와! 노은유, 혀 굴리는 거 장난 아니다!’ 하고 감탄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우리 학교에는 은유만큼 영어 잘하는 아이가 여러 명이다. 그 애들은 밉상 명단에 없다. 게다가 은유는 나대는 성격도 아니다.
내 친구들은 말한다.
‘노은유는 쉬는 시간에 잠을 너무 많이 자. 학교가 싫으니까 그런 거야. 우리 학교를 무시하는 거지.’
‘뭘 물으면 금방 대답하는 법이 없어. 내 질문이 우스운가?’
‘순대랑 닭발 먹을 때는 어떻고. 혐오하는 표정 다 보이는데, 일부러 잘 먹는 척한다?’
‘체육복에서 세제 냄새 나는 거 알아? 섬유 린스도 안 쓰고 빨래하나 봐.’
하여간 내 친구들이 은유를 싫어하는 이유는 백만 가지도 넘는데, 진짜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황효정에 비해, 은유는 우리만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말고는 은유를 싫어하는 아이를 못 봤다.
노은유는 왜 미운털이 박혔을까? 하긴 그게 뭐 중요한가. 그냥 싫은 사람도 있는 거지. 어쨌든 내 친구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아리아 내가 짝이 되었다. 환장하시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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